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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U Magazine 5월 2주차 -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

FCU magazine/2023-24 시즌

by FCU회장 2024. 5. 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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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U Magazine 5월 2주차 -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

 

제작자: FCU 이사 박규빈, 이사 장성경

 

 


Ⅰ. 메인테마 칼럼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

-  임규진

 

1. 서론

 

한 시대를 풍미한 뜨거운 라이벌인 메시와 호날두

 

 

여러분들은 축구를 왜 좋아하는가?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많은 이유가 있다.

좋아하는 선수가 있다던가 좋아하는 팀이 있는 게 대부분이라 생각한다.

최근에는 축구를 보는 팬들의 시야가 넓어져, 감독을 좋아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카타르 월드컵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축구에 응원하게 되었는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축구에 입문하는 계기 역시 다양한 이유가 있다. 보통 월드컵이 축구에 입문하는 대표적인 계기다.

 

내가 어떻게 축구에 입문했는지, 왜 그렇게 축구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직접 축구를 보면서 느낀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통해 축구가 가진 가치에 관해 이야기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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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포항 스틸러스

나는 평소에 K리그 포항 스틸러스, 세리에A  AC 밀란, 분데스리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라리가 아틀레틱 클루브를 응원한다. EPL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응원했었지만, 현재는 응원은 하지 않고, 가끔 보는 정도다. 국내축구와 해외축구를 가리지 않고 본다.

 

포항 서포터즈와 함께하는 선수단
 

[1.1 포항 스틸러스의 입문]


사람들이 K리그에 입문하는 계기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지역, 흔히 말하는 로컬 팬이라 볼 수 있다. 나는 포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군 복무도 포항에서 했다. 그만큼 포항이라는 도시에 애착심이 깊다.

 

어린 시절,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친구네 집에 갔다. 그 곳에서 우연히 포항 스틸러스를 보러 갈 기회가 생겨 인생 처음으로 축구 관람을 하였다. 그 이후로 나는 포항 사람인만큼 포항 경기를 많이 보며 자연스레 포항 스틸러스를 응원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포항을 꾸준하게 응원하고 있다.

선수에게 사인을 받음으로서 더 응원하게 된다.

 

[1.2 평생 남을 나의 경기장 안팎으로의 기억]

그렇게 응원을 하면서, 경기장 안팎으로의 각자 저마다의 추억이 있을 것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팀이 우승하고, 좋아하는 선수에게 사인을 받고, 사진도 찍어주는 등 많은 추억이 있다. 선수들이 팬들에게 팬서비스를 해주면서 누군가에는 잊지 못하는 기억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나는 경기장을 찾아가면 늘 있던 자리에서 친근하게 맞아주며 용돈을 쥐여주던 아저씨, 열심히 응원하라고 간식을 나눠준 아주머니 등 좋은 기억들이 있다. 결국에는 축구 때문에 경험을 할 수 있던 것이고, 이 기억은 평생 남게 될 기억이 될 거 같다.


10년 만에 FA컵 우승을 차지한 포항 스틸러스

 

 

[1.3 단순한 팬에서 지지자가 되기까지]

 

어릴 때는 포항이 자주 우승하였고, 우승을 하면 행복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2013년 포항의 더블 달성이 나의 학창 시절 마지막 우승이 되었다. 이후로 팀은 아쉬운 성적을 거두며, 우승하고 거리가 많이 멀어진 팀이 되었다. 하지만 팬(Fan)이라는 뜻이 무슨 뜻인가. Fanatic의 줄임말로 '광신도'라는 뜻이다. 나는 팀이 잘하든 못하든 광신도처럼 경기장을 찾아갔고, 매번 꾸준하게 응원하였다. 그리고 군 생활을 하던 도중, 지인을 통해 우연히 포항 서포터즈에 가입할 기회가 생겨 가입하였고, 포항이 10년 만에 FA컵에서 우승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현재는 전역 후에도 서포터즈 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단순한 팬에서 지지자로 되었다.

 

II.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나의 어린 시절, 영웅이였던 박지성

 

[2.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문]

평소 부모님이 스포츠를 좋아하셨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어린 시절 내가 축구를 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텔레비전을 켜서 스포츠 채널을 보면 EPL 중계를 해줘서 보고 있었고, 특히 맨유 경기 위주로 해줬었다. 맨유는 그 당시에 최고의 팀인 데다 그중에 박지성이 있었고, 한국인이 이런 팀에 있다는 거에 보게 되었던 거 같다. 그러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보고 나서 완전히 맨유를 좋아하게 된 거 같다. 맨유를 쭉 보면서 박지성이 경기장에 나와서 활약을 하면 어린 마음에 가슴 설레곤 했다.

 

빅이어를 들어올리는 바르셀로나

 

[2.2 챔피언스리그의 악몽]

2010/11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잊을 수 없었다. 당시 9살이었던 나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팀은 맨유였고, 무조건 우승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의 'MVP' 라인으로 불리는 리오넬 메시, 다비드 비야, 페드로로 이어지는 공격진의 화력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경기 결과를 보고 눈물을 흘리게끔 하였다.

 

마지막 경기를 입장하는 퍼거슨 경

 

[2.3 시들어진 감정]

좋아했던 박지성도 맨유를 나가게 되고, 퍼거슨 감독도 은퇴하며, 맨유를 응원하던 마음도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팀에 주축이었던 루이스 나니도 팀을 떠났고, 얼마 안 가서 루니도 떠남과 함께 맨유를 보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고, 더 이상 맨유를 응원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좋아하는 팀은 아니지만 가끔 보는 팀 중 하나다.

 

 

III. AC밀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우승한 AC밀란

 

[3.1 AC밀란 입문]

맨유의 관심이 사그라들던 찰나에, 우연히 AC밀란의 역사를 찾아보며, 정말로 위대한 팀이라는 걸 알게 된다. 당시에 몰락한 명가로 불렸던 밀란이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우승하며, 관심을 두게 되며, 지속해서 보기 시작했다. 또한 용홍리가 구단을 인수하며, 중국의 엄청난 자본으로 투자한다는 소식에 굉장히 흥미로워졌었다.

 

감독직으로 AC 밀란에 복귀한 젠나로 가투소

 

그리고 열정적이고, 투지있는 가투소의 모습을 아주 좋아했었다. 그래서 밀란을 응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시즌 시작 후 얼마 가지 않아, 투자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감독인 몬텔라가 경질되며, 좋아하는 가투소가 감독직을 맡게 된다. 또 레전드 돌려막기 하냐고 한참 말이 많았었다.

 

 

유로파리그에서 AC밀란 상대로 승리를 거둔 아스날


[3.2 씁쓸한 로쏘네리]

그 후 유로파리그에서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패배하였고, 한동안 아스날 팬인 친구들이 나에게 종종 놀리곤 했다. 그러자 내가 "유럽대항전 우승컵 하나 없는 팀이라 부러워서 그러는 거냐?" 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에게 역으로 화를 냈었다. 사실 분하기도 했고, 굉장히 씁쓸했다.

 

파산했던 용홍리의 사진
 
 

[3.3 응원 팀이 없어질 위기]

어느 날 용홍리 구단주가 파산하였고, AC밀란 마찬가지로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었다. 기사를 접한 친구들도 나를 향해 놀리지도 않았고, 걱정을 오히려 해줬던 기억이 있다. 한동안은 응원을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지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하였고, 끝까지 응원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엘리엇이 구단주가 되며, 운영하게 되었고, AC밀란의 절대 레전드인 '파올로 말디니' 단장과 함께 차차 리빌딩을 하게 된다.

 

AC밀란을 응원하며, 제일 기쁜 순간이였다.

 

[3.4 기다림의 끝은 행복]

코로나 전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고, 다음 시즌은 8년 만의 챔스 진출과 함께 밝은 희망을 보았고, 그다음 시즌에는 11년 만에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며,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놀림당하던 설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소방수로 왔던 피올리는 본인의 전술과 선수단에 변화를 줬고, 끝내 리그 우승이라는 업적을 달성하게 된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시가를 물며, 등장하는 모습은 정말로 인상적이였다.


즐라탄 마찬가지로 경기장 내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영향력을 보여주며, 몰락한 명가를 원래의 자리로 앉혀놓게 된다. 이로써 19번째 스쿠데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로쏘네리들은 밀란의 암흑기를 견뎌내며, 기다림의 끝은 행복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IV.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현역 시절 그의 모습이 지하철 기둥에 있다.


[4.1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입문]

EPL과 세리에를 보다 보니 분데스리가가 궁금해졌다. 더군다나 한국 축구의 역사에 관심도 많았던지라 차범근이라는 이름 세글자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었을뿐더러, 그가 활약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관심이 커졌다.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는 팀은 아니지만, 그들만의 역사가 있고, 감성이 있었다. 나는 그 매력에 흠뻑 빠진 채 응원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의 홈 구장인 캄 노우를 점령하다시피 하는 엄청난 광경을 보여줬다.


[4.2 프랑크푸르트의 열기]

21/22시즌 유로파리그 8강 2차전 바르셀로나 원정행을 가야 했던 프랑크푸르트는 엄청난 광경을 보여줬다. 경기 결과 이전에 팬들이 바르셀로나 홈 경기장인 캄 노우에 3만 명 정도 입장을 하며, 홈 분위기를 연상케 하여 바르셀로나를 응원으로 압도하였고, 그 결과 바르셀로나를 홈에서 3-2로 제압하는 엄청난 결과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선수들의 기량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 팬들이 최대한 만들어줄 수 있는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팬들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우승이다.


그 기세를 몰아서 유로파리그에서 42년 만에 우승컵을 들게 된다. 유로파리그 우승 팀 자격으로 다음 시즌에는 63년 만의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 짓으며, 지난 시즌의 목표를 이번 시즌에 이루게 되어 행복한 시즌을 보냈다.

 

 

V. 아틀레틱 클루브

 

항구도시답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배를 띄웠다.


[5.1 아틀레틱 클루브의 입문]

세리에, 분데스리가와 함께 라리가까지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응원 팀이 없던 찰나에 전 세계 팀 어디를 뒤져도 가장 특이한 영입 정책을 갖고 있는 팀이라 관심을 끌게 되었다. 지역 출신 위주의 영입 정책이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항구 도시인 것까지 포항과 비슷한 느낌도 있었던지라 응원하게 되었다.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을 위해 모인 페냐 회원들과 현지인들이다.


[5.2 잊지 못할 빌바오 현지인들의 기억]

아틀레틱 클루브가 코파 델 레이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결승전까지 진출하게 된다. 결승전은 한국 아틀레틱 클루브 팬 모임인 페냐 회원들과 현지인들이 모여 서울 신촌의 어느 한 펍에서 단체 관람했었다. 현지인들은 현지 음식을 가져오며, 페냐 회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고, 그들끼리 전통 음악에 맞춰서 전통춤을 추기도 했다. 경기 시작 전까지 현지인들이 펍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결승전 준비를 했다. 30명 정도의 현지인들이 왔기에 순간적으로 스페인에 온 기분이 들었다.

40년 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한 아틀레틱 클루브


경기가 시작되었고, 반칙을 당할 때마다 온갖 욕설이 들렸다. 스페인어를 할 줄은 모르지만 욕을 하는건 분명했다. 사람 사는게 비슷하다는걸 깨닫았다. 연장 시작하기 전에 쿠팡플레이 해설에서 신촌의 한 술집에서 아틀레틱 클루브를 응원하기 위해 현지인들도 왔다고 언급까지 해줬다. 결국 응원에 힘입었는지 아틀레틱 클루브가 우승하며, 끝을 맺었다.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VI. 쓰라린 기억

루이스 피구에 대한 바르셀로나 팬들의 심정을 피구에게 선물로 줬다.

 

물론 축구를 보고 응원을 하면서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팬들에게 실망스러운 행동이나 말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고 떠난 선수들이나 감독들도 있었다. 그 결과 많은 팬들이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낀 팬들은 경기장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의 이적으로 인해 많은 이야기를 만들게 된다.

 

[6.1 예상하지 못한 배신과 허탈감]

 

보통 팬들은 선수들과 팀을 믿으며, 굳게 응원을 한다. 하지만 그 믿음은 허탈감으로 돌아올 때가 있었다. 마치 포항에서의 설기현이 팬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례처럼 말이다. 특히나 설기현은 고액 연봉으로 계약하였고, 입단 후 첫 훈련에서의 부상으로 전반기를 다 날려버렸다. 경기에 나오면 아쉬운 결정력으로 팬들이 비난을 하였고, 경기에 나오면 아쉬운 결정력으로 팬들이 비난을 하였고, 한술 더 떠 팬들과 충돌하는 부정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포항 서포터즈가 내세운 설기현을 향한 걸개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팀과 팬들에게 재계약 의사를 밝혔고, 팬들도 다음 시즌에는 잘해보자고는 의미에서 생일 파티를 열어줬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재계약을 할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개막 직전에 포항의 라이벌인 울산으로 가는 충격적인 이적을 하게 되며,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그는 포항에서 배신자가 되었고, 금지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프랑크푸르트의 챔피언스리그 진출 희망을 가지게 해줬으나, 그 희망을 다시 망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6.2 깨져버린 믿음]

 

좋은 선수들이 팀을 떠나도 감독의 역량으로 얼추 보완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런 역량을 보여준 감독들은 선수들보다 감독을 더 믿는 팬들도 있다. 하지만 감독의 행동으로 인해서 격분한 사례도 있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아디 휘터는 시즌 도중, 다른 팀으로 가는 루머가 떴었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로 팀에 남는다며, 그 루머를 일축했고, 그렇게 넘어가는가 싶었지만, 결국에는 공식 발표가 나오고 난 뒤 많은 팬들이 실망을 하였다.

 

그렇지만 팀은 62년 만에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유종의 미를 거둔다면, 그래도 나쁘진 않은 이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던 그의 말과 달리 분데스리가 꼴찌를 달리던 샬케와의 경기에서 패하는 최악의 모습을 보이며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한다. 프랑크푸르트 팬들의 믿음은 그렇게 깨져버림과 동시에 격분했다.

 

 

VII. 팬들의 충성심과 존중

 

 

팬들이 경기장을 찾는데 있어서는 큰 이유는 없다. 단지 자신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서다. 팀이 잘하든 못하든 우리의 연고지를 위해서 뛰어주는 선수들을 응원해주는 팬들을 위해서, 선수들은 더 열심히 뛰어줄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팬들은 경기의 결과를 만들 수는 없어도 경기장의 분위기는 만들 수가 있어서 그렇다.

 

선수들의 배신, 감독들의 무능함으로 인해서 팬들은 큰 실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경기장을 지키며, 자리를 채워주는 팬들이 있기에 팀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선수들이 활약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해서 팬은 우월의식을 가져서도 안된다. 팬, 선수단, 구단이 소통을 하며, 공존공생의 관계가 되어야 더 옳바른 문화를 만들 수가 있다.

 

 

 

VIII. 축구의 가치와 정의

단순히 '축구' 하나로 인해서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감정을 느끼고, 소통하며, 경험하고, 새로운 것을 배운 것이 나에게는 정말로 크게 와닿았다. 보통 사람들이 축구를 응원하는 건 취미에 불과하지만, 나에겐 삶의 한 부분으로 차지할 정도로 큰 영향을 받았다. 그것이 내가 느낀 축구의 가치다.

축구의 입문은 방법은 정말 다양하며, 우리가 축구를 왜 사랑하는지는 한 문장으로는 정의할 수가 없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것에는 변함없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 이 질문을 던지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왜 축구를 사랑하는가?'

 

 

원글 출처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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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gdin.tistory.com

 


Ⅱ. 테마 칼럼

 

Ⅱ-Ⅰ. '팬들의 여론과 진실, 그 사이에서 내 스탠스'

- 박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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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팬들의 보고 싶어하는 것과 진실 사이의 괴리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나는 축구 블로그를 다년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 블로그는 특정 주제의 역대 올스타와 인물들에 대한 순위 매기기를 바탕으로 컸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이는 많은 논란을 따른다. 그 과정에서 내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무례한 태도를 견지하며 자신의 의견만 내는 일부 사람들을 차단하기도 했다. 봐주는 사람을 한 명 잃는 거지만 이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선 스트레스 관리는 필수고 나는 진상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마인드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특히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클럽 역대 올스타에 있었다. 아시다시피 지역 및 국내 최고의 라이벌 구단들끼리는 사이가 좋지 못하고 선수들도 이런 상황에서 라이벌 팀으로 옮기는 행위는 금기시하기 때문이다.

 

 

캠벨의 토트넘 시절. 하지만 캠벨은 지역 라이벌 아스날로 자유계약으로 떠나버렸고 스퍼스의 금기어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금기를 어긴 선수들 역시 소수지만 항상 있었는데 문제는 이들 중 해당 구단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경우도 많았고 이에 나는 그들을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항상 선정했다. 대표적인 예가 FC 서울 역대 올스타팀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K리그 톱클래스의 선수이자 서울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임과 동시에 구단 최강의 선수 중 한 명인 데얀을 선정했다.

 

 

최고의 업적이자 최악의 여론을 동시에 가진 FC 서울에서의 데얀



그러나 데얀은 황선홍과의 갈등으로 인해 구단에서 입지를 잃었고 결국 울산 현대와 같은 다른 팀들의 오퍼를 거절하고 FC 서울과 최악의 라이벌 관계였던 수원 삼성으로 이적했고 서울 팬들은 데얀을 규탄하기 시작했고 데얀을 FC 서울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넣으면 화를 내는 경우가 잦았다. 비슷한 예가 여러 번 있었지만 파급력이 데얀만큼 큰 선수는 드물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팬들의 여론과 진실, 그 사이에서 내 스탠스를 오랜 기간 정리했다.


2. 팬의 목소리


대한민국의 농구감독 최희암은 "너희들이 볼펜 한 자루라도 스스로 만들어본 적이 있느냐? 너희 같이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주업으로 삼으면서 돈 벌고 대접받고 하는 것은 팬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다. 팬들에게 잘해야 된다."라고 말하며 선수들에게 팬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명장 알렉스 퍼거슨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 중 일부가 경기에서 패했다고 팬서비스 요청을 무시하자 "도대체 너희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팬들이 너희들의 연봉을 주는 사람이다. 저분들은 너를 보고 온 거야."라고 외쳤다.

 



최희암과 퍼거슨이 한 말은 추호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다. 축구와 농구를 포함해 소위 예체능은 생산성이 거의 없지만 팬들을 즐겁게 해 주며 후원을 받으며 산업을 발전시켰기에 당연하게도 팬의 입김 자체는 무시할 수 없다. 만약 내가 구단과 관계된 사람이었다면 팬들의 눈치를 어느 정도 봤을 것이다. 팬들의 니즈를 맞춰주는 게 구단 관계자의 역할이 맞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 구단에게 돈 받고 베스트 일레븐 선정하라고 했으면 데얀은 제외하고 뽑았을 공산이 크며 광고주였어도 서울에서 현재 가장 민심이 좋은 선수들을 앞세워 광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개인의 문제는 다르다. 팬들의 다수결 여론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개인이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자유다. 서울 팬들의 95% 이상이 데얀을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극소수의 아닌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싫긴 하지만 구단에 세운 업적을 존중한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그들이 이런 여론을 펼치는걸 서포터즈라는 이름하에 억압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들이 공식적으로 서울 팬덤의 대표로 말한 것도 아니고 개인의 생각을 말했는데 그럴 수가 없다. 이걸 부정한다면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팬 각자에게는 특정 대상을 싫어할 권리가 있으며 구단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넣지 않을 권리 역시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정 대상이 팀을 좋지 않게 떠났음에도 그의 업적을 인정할 권리가 있고 구단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할 자유도 있다. 이는 모두 범죄의 테두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설득도 아니고 강요를 하는 부분은 잘못된 거다. 실제로 법을 어기는 행위이며 도의적으로도 실례지 않는가? 서포터즈의 입장이 다수의 여론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팬들의 여론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다.

실제로 그의 오랜 부상복귀를 기다려준 인테르를 버리고 레알 마드리드로 떠난 호나우두도 인테르 팬들의 팬투표로 최초의 명예의 전당 멤버 4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그렇다고 호나우두를 무조건 인테르 레전드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최악의 배신자라 불리는 루이스 피구는 바르셀로나에 있던 기간 동안 히바우두, 클루이베르트와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며 맹활약했지만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거짓말까지 쳐서 팬들의 민심은 최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구가 바르셀로나에서 세운 업적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진정한 바르셀로나 팬이 아닌 것이 아니다.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하면서 전 소속팀 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던 호나우두와 피구



즉 팬덤은 다양한 객체의 사람들이 모여있고 내부의 주류 의견을 거스른다고 그들이 서포터가 아닌 것이 아니다. 그 구단을 좋아해서 응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게 서포터가 아니면 무엇이 서포터겠는가?


3.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팬들이 말하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팬도 아니면서 남의 구단 이야기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타팀의 팬들이 놀리는 경우를 경계해서 한 발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타팀팬이라고 그 팀에 대해 언급할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해당 팬이 아니라도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으며 축구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들 역시 많아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통 자신들이 믿고 싶어하는 부분을 믿고 보고 싶어하는 부분만 보려는 게 본성이고 대다수의 팬들이 그렇다. 그래서 과거의 에이스가 세운 업적을 보지 않으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진실을 탐독하고자 하는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 축구 자체를 하나의 학문이라 생각하고 탐독하는 사람도 전 세계에 상당히 많고 그들은 커뮤니티 혹은 자신의 블로그 및 유튜브에서 자신의 관점을 대중들에게 설파한다.

 

 

축구 역사상 손꼽히는 천재 크루이프는 자신의 방식 외에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아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들에게 축구는 하나의 연구대상이자 철학이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구단의 입장보다는 자신의 관점에 따라 축구를 탐독한다. 그래서 해당 팀의 팬들이 외면하고 싶어하는 부분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나도 이 부류의 사람이다.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축구사에 대해 탐독하다가 이 길을 택했다. 내가 우월하고 일반 팬들이 열등하다는 게 아니다. 서포팅 방식의 차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생각을 존중한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내 생각을 존중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긍정하지 않을 권리는 있다. 하지만 존중은 일방향이 아니다. 부정할 권리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입을 막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집단의 위력을 동원해 강제로 입을 막으려고 한다면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도 그게 사이버불링이고 이는 범죄다. 건전한 의견 교환을 저해하고 축구팬들을 피곤하고 지치게 만들어 떠나게 하는 행동인 것은 덤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들을 권리를 이렇게 잃어가는 것임과 동시에 축구시장의 폭을 좁히는 판에 대해 실례인 행동이다.

당신들의 의견이 소중하면 당신들과 반대되는 사람의 의견 역시 소중하다. 물론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이라면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무례한 태도를 견지한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팬도 아니면서 남의 구단 이야기 하는 것을 못하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4. 일개 축구팬 토르난테의 스탠스는?

 

나도 한때는 그들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에 꽤 오랜 기간 동안 반발했고 그들의 의견을 틀린 것으로 치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태도는 잘못됐다고 판단하고 그들의 의견을 틀렸다고 매도하지도, 바꾸려고 설득하지도 않기로 했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응원했다.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직관을 가서 큰 목소리로 응원하고, 구단에서 내는 굿즈를 사며 구단이 광고하는 제품을 산다. 그들이 있기에 구단의 투자도 있고 덕분에 시장이 커져 나도 즐길 컨텐츠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아발란차라 불리는 엄청난 응원을 보여주는 보카 주니어스의 팬들



하지만 그들 역시 내가 어떻게 뽑든 내 관점은 존중해 줬으면 좋겠다. 내가 사실을 잘못 알고 있거나 관점에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의견을 내서 지적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구단에서 배신자라고 욕먹는 인물들의 업적 역시 널리 기록하고 평가할 것이다. 그게 내가 축구를 대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난 앞으로도 계속 여러분들을 존중하겠다. 내 의견에 대해 동의하라고 강요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도 내가 축구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는 존중했으면 좋겠다. 다시 한번 말한다. 존중은 일방향이 아니다.

 

 

원문 출처

 

 

팬들의 여론과 진실, 그 사이에서 내 스탠스

1. 팬들의 보고 싶어하는 것과 진실 사이의 괴리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나는 축구 블로그를 다년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 블로그는 특정 주제의 역대 올스타와 인물들에 대한 순위 매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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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Ⅱ.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가치' 

- 권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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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팀마다 전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고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여러분들은 응원하는 축구팀을 선택했던 가치는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속한 서포터스의 문화는 어떠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축구를 보면서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팀의 역사, 문화, 팀의 스쿼드 등 여러 가지의 가치가 있다.
 
수원삼성을 접했을 때 나를 빠지게 했던 첫 나의 가치는 팀의 한 선수였다.

충북청주가 나에게 준 가장 큰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축구'를 좋아함으로써 가장 큰 가치는 무엇인가? 여러 가치들이 있지만 나는 '직관'이라는 가치가 어느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축구경기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TV중계로 접하는 방법과 인터넷포탈과 신문과 같은 매체들을 활용해 결과를 접하는 방법, 축구 경기장에서 직접 보는 방법 등 축구를 접할 수 있는 방식이 많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가장 좋아하는 접근은 축구를 내가 경기장에 직접 가서 보는 것이다. 축구장에서 보는 축구와 중계로 보는 축구는 카메라의 중계각도등 여러 가지의 이유로 다르게 느껴진다.

청주종합운동장의 모습

 


경기장에서는 경기뿐만 아닌 관중석에 앉아있는 서포터즈들의 응원문화, 퍼포먼스의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먹으면서 피크닉의 개념으로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기에 어떤 다른 매체들 중에서 경기장에서 직접 가서 관람하는 직관의 가치가 가장 크다고 생각을 한다.
 
차로 왕복 4시간의 거리의 수원월드컵경기장 vs 왕복 20분 거리의 청주 종합운동장 이 부분이 같은 리그에 처함으로써 선택해야 하는 팀에서 충북청주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이다. 흔히 로컬팀을 따라간 케이스 중 하나이다.

 


ULTRAS NNN의 이야기

청주종합운동장 N가 구역에서 충북청주 FC라는 팀을 위해 팀을 위해 뛰는 선수들을 위해 한 목소리를 내는 집단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ULTRAS NNN(이하 NNN)' 

NNN은 K리그 2에서 응원으로 내로라하는 부천과 안양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실제로 스포츠니어스 김현회 기자가 썰방에서 언급한 이야기)로 엄청난 열기의 서포팅을 하고 있다. 어떻게 창단 2년 차인 팀에서 이러한 서포터스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들의 이름 ULTRAS NNN

 

FC 청주라는 이름이 흔히 사용되는 구단명을 사용하게 된대에는 1999년 11월 13일 S&P(축구와 사람들)라는 이름으로 당시 프로축구단이 없던 충청북도에서 구단 창단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구단 창단을 지지하는 개개인들이 모여 먼저 모임을 결성하게 되었다. -ULTRAS NNN 나무위키 발췌
 
1999년부터 고장 청주에 프로팀창단을 간절히 염원하고 기원하며 창단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한 사람들이고, 해당 준비를 하며 충북 붉은 악마를 같이 활동하며 붉은 악마 전국의장, 콜리더등 소위 말하는 '짬바'가 넘치는 사람들이 NNN을 이끌고 있고 이들의 열성적인 응원을 보고 코어존에 점점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꽤 큰 규모의 서포터가 뭉치게 되었다.
 
서포터즈 명인 ULTRAS NNN. 왜 부정적인 이름을 팀이름에 쓰냐?
 
ULTRAS라는 의미는 결코 나쁜 의미가 아니다. 
 
ULTRAS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자, 울트라스(Ultras)는 열광적인 축구  팬을 가리킨다.-위키백과
 
사전적의 의미를 보면 과연 이게 부정적인 뜻일까? 해외에서의 과격한 팬문화가 ULTRAS라는 의미를 변질시킨 것이지 결코 나쁜 뜻이 아니다.
 
NNN은 어느 서포터즈보다 클린서포팅을 추구하는 서포터즈인데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NNN의 구성원중 가족단위가 상당히 많다. 그렇기에 아이들도 많다. 콜리더는 해당 사실을 알기에 경기 중 비속어 및 부정적으로 보일만한 행동을 지양시킨다.

경기 중 야유가 순간 야유가 터져 나올 땐 ' 여러분 야유 대신 우리 우리 팀을 위해 응원하여 경기장을 우리의 목소리로 뒤덮어 버립시다!'로 야유를 멈추기도 한다.

원정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나온 잔해물 뒷정리도 빗자루를 준비해 가며 정리할 정도로 철저하다 그렇기에 실제로 코리아컵 대구전에서 클린서포터라고 언급을 받을 수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팀과 아름다운 문화를 가진 서포터즈의 일원으로 축구라는 하나의 종목에서 행복을 찾았다.
당신들이 찾는 행복은 어떠한 점에서 나오는지 댓글로 남겨주길 바란다.
 
이로써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마쳤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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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가치

모든 팀마다 전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고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여러분들은 응원하는 축구팀을 선택했던 가치는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속한 서포터스의 문화는 어떠한 문화를 가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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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Ⅲ. '엘 마드리갈이 되었던 것에는 이유가 없었다.'

- 박영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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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비야레알 팬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원클럽맨 브루노 소리아노

I. 서론

 

축구를 좋아하는 모두에게는 정말 본인이 진심으로 응원하는 팀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어릴 적부터 축구라는 스포츠에 접했던 나로서는 응원팀이 생긴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기도 했다. 남들이 응원하는 팀들의 정보는 이미 방대했고, 남들이 응원하는 팀들을 응원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 강팀충 " 같아보여 꺼려졌다.

 

나는 비야레알이라는 팀을 알기 이전 과거에는 맨체스터 시티를 정말 진심으로 응원했었다. 정이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맨체스터 시티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후 솔직하게 말하면 " 내가 이 팀을 더 이상 응원하지 않아도, 한국에도 이 팀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사실 관둔 것이나 똑같다.

 

잡 얘기가 길었다. 난 엘 마드리갈, 비야레알 CF의 팬이다. 응원하게 된 이유는 기억난다고 말할 수 없다. 

 

사실 남들이 나에게 " 비야레알 같은 변방 팀을 왜 응원해, 레알 마드리드나 FC 바르셀로나 같은 강팀을 응원하는 게 맞지 않겠어? "라고 물을 때 역시도 나는 " 좋아하는데, 이유가 필요해? "라는 말로 받아쳤고, 그들은 날 어리석다는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래도 어찌한가, 한 번 응원한 팀이 있다면 그 팀을 버리는 행동은 더 어리석어 보였다.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말하길, "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다. " 고 한다. 비야레알이라는 팀을 원해서 응원했다기 보단, 이 팀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것이었다.

 

 

비야레알의 첫 번째 유럽 대항전 우승, 이 때처럼 기쁜 일은 이 일이 일어난 후 내년이였다.

II. 본론 

 

내가 응원하는 팀이 생겼다면, 그 팀의 문화와 팬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감독과 선수에게 눈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먼저 선수 감독 구성 당시 내가 비야레알을 처음 응원했을 때는 하비에르 카예하 감독이 재부임하여 다시 팀을 이끌고 있을 당시였다. 

 

그때 비야레알은 사실상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비야레알의 상징적 7번인 제라르 모레노의 활약과 지금까지 현역이지만, 그래도 메이저 1부 무대에서 사실상 라스트 댄스를 추던 산티 카솔라의 활약이 주요했다.

 

하지만 난 이들에게 눈이 가지 않았다. 서론에서 말했다시피, 남들 역시도 응원해 줄 수 있는 선수는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난 이 팀의 문화와 팬들을 사랑하려 하였기에, 이 팀이 사랑해 주는 선수를 원했던 것 같다. 그 선수가 비야레알의 원클럽맨이었던 마리오 가스파르와 비야레알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반열에 낄 수 있는 브루노 소리아노가 이 팀의 팬이 되어 줄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둘은 한국에서 크게 알려진 선수들은 아니었기에 나에게 메리트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이 팀과 팬 모두가 사랑하는 두 선수였기에 더 빠져들게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실, 온전하게 비야레알 팬으로 자리 잡은 것은 먹튀긴 했지만, 파코 알카세르와 그래도 긍정적인 활약을 가끔가다 보여주었던 카를로스 바카의 좋은 활약 덕이기도 하다. 파코 알카세르는 리그에서만 좋은 활약을, 카를로스 바카는 제라르 모레노와 같이 유로파리그와 리그 양 측면에서 좋은 조커 역할을 해준 선수였다. 

제대로 이 팀에 스며들 수 있던 이유

앞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준 선수들도 좋지만, 난 비야레알의 현지 팬들에게 정말 큰 박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비야레알의 현지 팬들은 패배에 있어서도 박수를 주고, 비야레알을 꺾은 팀에게도 박수를 주는 대인배적인 영향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인다면 자기 객관화가 정말 잘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 역시도 비야레알이 보여준 언더독의 낭만 시즌인 21-22 UEFA 챔피언스리그의 사진이다. 비야레알은 21-22 챔피언스리그에서 조별예선부터 언더독의 포지션이었다. 아탈란타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조별예선에 걸린 비야레알은 언더독이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비야레알은 조 2위로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진출했다.

 

사실, 난 이때 좌절했다. 챔피언스리그에 늘 약했던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당시 비야레알 감독인 우나이 에메리 감독이었지만 유로파리그의 황제였던 우나이 에메리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비야레알이 우승컵 하나 더 들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는 듯, 비야레알은 16강전 유벤투스를 3-0이라는 스코어로 대파하며 진출했고, 8강 바이에른 뮌헨전에는 헤모니오 루이의 선방쇼와 정신력, 역습 한방으로 바이에른 뮌헨을 꺾어냈고, 4강 리버풀전에는 1차전 2-0으로 패배했지만, 2차전에 먼저 세트스코어 2-2를 만들었지만 정신력 부족으로 내리 3골을 실점하며 4강에서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짐을 싸야만 했다.

 

비야레알은 아르나우트 단주마와 당시 임대생이던 죠반니 로 셀소의 대활약, 그리고 아센호 골키퍼를 밀어내고 확실하게 주전 자리를 차지한 헤모니오 루이 골키퍼의 활약 덕에 챔피언스리그 4강 무대에 올라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래서 빠졌던 것 같다. 이 팀은 내 예상을 벗어나는 팀이었다. 유로파리그 우승도, 사실 어려워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선수 구성이 좋은 팀도 아니었고, 지금은 훌륭한 감독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우나이 에메리 감독도 사실 정말 비야레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아쉬운 팀으로 자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애매한 팀 그 자체였지만, 이곳까지 자리해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워 이 팀의 팬이 안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III. 결론

 

이유 없는 사랑이었다. 나의 예상을 벗어나는 변수의 팀, 위치 자체가 어디여도 이상하지 않을 변화무쌍한 팀이다. 남들의 시선이 부정적이어도 어떠한가, 내가 이 팀을 부정적으로 평가해도 어떠한가, 이 팀이 내리막길을 걸어도 어떠한가. 이 팀을 응원하게 된 이상 이 사랑에는 후회가 없어야 한다.

 

내가 이 팀에게 감정을 썼고, 돈을 썼다면, 이 팀 역시도 나에게 감정을 줄 것이고, 사랑을 줄 것이다.

 

그것이 응원하는 팀이 팬에게 해줄 수 있는 보상이다. 정말 이유 없는 사랑이다.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사랑에 후회는 있었는가?

 

 

원문 출처

 

 

[ 엘 마드리갈이 되었던 것에는 이유가 없었다. ]

I. 서론 축구를 좋아하는 모두에게는 정말 본인이 진심으로 응원하는 팀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어릴 적부터 축구라는 스포츠에 접했던 나로서는 응원팀이 생긴다는 것은 어찌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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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Ⅳ .'우리가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 (feat.내가 뮌헨에 열광하는 이유)'

- 박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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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 빠져들게 된 계기

 

마네이랑의 비극

 

 

언제였을까. 내 기억 속 축구에 대한 첫 기억은 2010 남아공 월드컵 당시 가족들과 큰 광장에서 스크린으로 우리나라의 경기를 시청했던 것이다. 사실 이때는 축구에 관심이 있어서 갔다가 보다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갔던 것이기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이 월드컵이 나를 축구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내 기억 속 최강의 축구팀이었던 브라질, 그랬던 브라질이 에이스였던 네이마르가 부상으로 빠지자 4강에서 독일에게 7-1로 패배하였다.

 

나에게 이 경기의 결과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독일이라는 나라, 그중에서도 독일의 에이스인 뮐러라는 선수에게 크게 관심이 갔다.

 

토마스 뮐러는 뭐랄까 화려하지도, 빠르지도, 신체 능력이 우수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축구를 잘하는 선수라는 게 딱 느껴졌다. 그가 있는 곳에서 공격이 이루어졌고 기회가 났으며 득점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인터뷰나 그와 관련된 영상을 보면 독일인 답지 않은 유머러스함과 끼가 보였다. 이런 뮐러에게 난 자연스레 빠져들게 되었고 그의 팀이자 고향클럽인 바이에른 뮌헨에게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은 나의 인생 클럽이 되었다.

 

 

내가 축구와 뮌헨에 열광하게 된 이유

 

바이에른 뮌헨 그 자체인 토마스 뮐러

 

 

토마스 뮐러를 통해 알게 된 바이에른 뮌헨과 축구는 나의 인생의 일부가 되었고 나의 삶의 이유가 되었다.

 

그 당시의 바이에른 뮌헨은 역대급의 퍼포먼스를 보이며 트레블을 이뤄낸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뒤를 이어 바르샤에서 트레블을 하고 온 펩 과르디올라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축구는 매력적이었고 상당히 흥미로웠다.

 

라인을 극단적으로 올리고 3백과 4백을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떻게든 공격지역에 선수들을 더 많이 투입하여 상대를 압박하고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보면 리그 내에서 약팀을 상대로 점유율이 70프로가 넘을 때도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공격적인 축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과르디올라가 가장 잘 쓰는 그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선수가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이자 나를 축구라는 스포츠로 데리고 와준 토마스 뮐러이니 난 더 재미있게 과르디올라의 축구를 보았고 행복하였다.

 

이러한 과르디올라의 축구는 가끔 답답하게 막힐 때도 있지만 상대팀을 압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기에 응원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재미있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잘하다가 납득이 되지 않는 전술을 실험하다가 아쉽게 탈락하였으나 그래도 거의 매번 4강 이상을 갔기에 정말 강력했다고 할 수 있다.

 

 

트레블을 이뤄낸 한지 플릭 휘하의 바이에른 뮌헨

 

 

이러한 과르디올라가 떠난 이후에도 바이에른 뮌헨은 4강과 8강은 꾸준히 진출했며 19/20 시즌 니코 코바치의 경질 이후 선임되었던 한지 플릭의 지휘아래 챔피언스리그 전승 우승 포함 트레블이라는 가히 역대급이라고 회자될만한 기록을 써 내려갈 만큼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국내대회뿐 아니라 국제대회에서도 강력한 모습을 보여준 바이에른 뮌헨에게 나는 자연스레 매료되었고 보고 싶지 않다고 투정해도 계속 경기를 보고 여러 가지 찾아보게 되었고 열광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팀은 알면 알 수록 더욱 매력적인 팀이었다. 1900년대부터 지금까지 3번 연속의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두 번의 트레블(그중 한 번은 전승우승)을 포함한 챔피언스리그 6회 우승, 11회 연속 분데스리가 우승을 포함한 33회의 분데스리가 우승, 20회의 DFB포칼 우승까지 엄청난 역사적 서사를 갖춘 팀이자 나치 독일의 핍박을 이겨낸 근본도 충만한 클럽이다.

 

50+1이라는 독일의 특별한 제도 때문에 시민구단으로 남았고 투자의 한계가 있었지만 자본도 많으며 내 기준에서는 청렴결백한 팀이었다. 승부조작을 한다든가, 여러 오심논란에 휩싸이게 된다든가 싶은 오명이 남을만한 짓도 안 하는 정말 매력적인 팀 그 자체이다. 다른 팀 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뮌헨은 완벽한 팀이다.

 

그래서 나는 뮌헨이라는 클럽에 매료되었고 그들이 하는 축구라는 스포츠에 매료되었고 그들의 일부가 되었고 그들도 나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들이 축구에 열광하게 된 이유

 

앞에서는 내가 축구에 열광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축구에 빠져들고 열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겠다.

 

4골 차이를 뒤집은 캄프 누의 기적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우선 축구라는 스포츠자체가 전반 45, 후반 45분 엄청 길지도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많은 변수들이 발생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기에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정적인 스포츠가 어디 있겠냐만은 축구만큼 역동적이고 많은 스토리들을 만들어내는 스포츠는 드물다고 생각한다.

 

언더독의 반란이라든지, 역대급의 반전 역전 혹은 동점 스토리라든지, 역대급 팀들 간의 경기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서사라든지 많은 이야기들을 자주 보여주는 스포츠가 축구라고 생각한다. 공은 둥글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역동성과 다양한 스토리들 이러한 요인들에 우리들이 매료되는 것이며 열광하게 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132년만에 첫 우승을 거두었던 레스터 시티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가 열광하게 되는 이유는 저마다의 낭만을 쫓을 수 있고 이룰 수 있게 해 주는 것 중 하나가 축구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언더독의 반란을 보고 언더독이라는 팀의 매력에 빠져 자신의 낭만을 이루어 갈 수도, 어떤 이는 압도적이 모습으로 다른 팀을 찍어 누르는 팀의 매력에 빠져 자신의 낭만을 이루어 갈 수도, 어떤 이는 약팀이었다가 점점 성장하면서 강해지는 팀의 매력에 빠져 자신의 낭만을 이루어 갈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축구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이렇기에 다양한 유형의 팬들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데스리가 첫 우승에 열광하는 레버쿠젠 팬들

 

세 번째로 우리가 열광하는 이유는 축구로 인해 우리들의 인생의 목표를 잡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당장에 글 쓴 본인도 축구라는 스포츠 덕분에 스포츠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꿈을 꾸게 되었고 이러한 꿈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목표도 생기게 되었다. 나의 인생의 목표는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구단에 직접적으로 소속이 되어서 일을 하는 것이고 대한민국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관련해서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을 이루어 나가기 위한 과정 중 하나로 이런 글들을 써 내려가고 있는 거 기도 하다. 이렇듯 축구로 인해서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정해질 수도 있기에 축구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고 열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우리들이 축구에 열광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들이 존재하기에 축구라는 스포츠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축구팀들이 명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문 링크

 

 

우리가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feat.내가 뮌헨에 열광하는 이유)

축구에 빠져들게 된 계기 언제였을까. 내 기억 속 축구에 대한 첫 기억은 2010 남아공 월드컵 당시 가족들과 큰 광장에서 스크린으로 우리나라의 경기를 시청했던 것이다. 사실 이때는 축구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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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Ⅴ. '축구 혐오자'에서 '공식 팬클럽 부회장'까지, 한 축구팬의 일대기.'

- 최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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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된 걸 환영합니다! 페냐 아틀레틱 클럽 코리아!"

이 한 문장이 아틀레틱 클럽 공식 트위터에 올라온 걸 본 그 순간 머릿속에서는 지난 9년간 팬으로서 활동한 나날들이 스쳐지나가고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함의 전율이 온몸에 흘렀다. 어떤 훌륭한 감독을 데려와서 엄청난 영화를 만들더라도 그때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축구에 죽고 축구에 살며 매주 새벽에 일어나서 아틀레틱 클럽과 서포팅하는 다른 팀들 경기를 보고 주말 오후에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경기를 보러 갈 만큼 충실한 축구팬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본다면 나는 축구를 싫어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밖에서 노는 건 좋아했는데 신기하게 운동을 배우는 건 싫어했다. 누구나 가는 태권도장도 가지 않았고 당연히 특공무술이나 검도 같은 운동하는 학원들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어떤 운동이라도 배우길 원하셨는지 동네 태권도장에서 운영하는 축구부에 나를 등록했다. 
 
당연히 운동을 배우기 싫어했으니 축구부에서도 겉을 맴돌았다. 하려는 의지도 딱히 없고 그렇다고 운동 신경이 좋아서 조금만 배워도 곧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축구부 내에서 연습경기할 때 공이 저 멀리 가있으면 옆에 있는 친구와 운동장의 모래로 모래놀이하기 바빴고 공이 오면 자동문 열리듯이 쉽게 뚫리거나 걷어내기만 바빴다.  원래 축구에 대해 관심도 없었던 데다 잘하지도 못하니 축구에 대한 감정은 날로 악화되었다. 나름 팀 스포츠라고 대회에 나가서 아쉽게 떨어졌을 때는 팀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축구부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운동장 사용문제 때문에 해체되었고 나는 다시 축구에 관심도 없고 어느 관련도 없는 초등학생으로 돌아갔다. 간간히 머릿수 채우려 반대항 축구경기에 나가서 볼만 걷어내는 흔하고 흔한 하는 것 없는 수비수 역할만 맡았다. 
 
이런 상황은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계속되었다. 방학기간에 사설 영어캠프에 간 적이 있는데 원어민 선생님이 피파 트레일러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영상을 보면서 뭔가 모를 반감이 저 밑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축구에 대한 반감이 쌓였던 탓일까 나도 아직까지 이유는 모르겠다.
 
이렇게 축구를 싫어하던 내가 어떻게 축구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본 축구경기가 그 시작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스페인으로 여행을 갔다. 무더운 8월의 세비야를 둘러본 뒤 호텔 방에 돌아와 씻고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어떤 축구 경기를 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와 상대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빨간색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팀이었다. 당연히 나는 좋든 싫든 네이마르, 수아레스 그리고 메시라는 유명한 선수들이 바르셀로나에서 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바르셀로나의 무난한 승리를 예상했다.
 
경기를 보던 중에 갑자기 빨강 하양팀 선수가 하프라인에서 슛을 때리더니 그대로 골문을 흔들었다. 뒤이어 그 팀의 다른 선수가 해트트릭을 꽂아 넣었다. 
 
그렇게 바르셀로나는 그 경기에서 4대0으로 처참히 무너졌다.
 
이 경기를 본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 최고의 팀이라고 알려진 바르셀로나가 소위 말하는 듣보잡 팀한테 이렇게 크게 무너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경기를 본 뒤 나는 바르셀로나를 이긴 팀을 찾아보았다. 그 팀의 이름은 아틀레틱 클럽이었고 신기하게도 지역 출신의 선수들만 기용한다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정책을 가지고 있음에도 라리가에서 한 번도 강등당한 적이 없고 바르셀로나 다음으로 스페인에 가장 많이 국왕컵을 들어올린 팀이었다. 아틀레틱이 정책과 역사로 쌓아올린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은 나를 순식간에 매혹시켰고 어느 한국인의 아틀레틱에 대한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경기는 2015년 수페르코파였다. 얼마나 충격이었으면 사진까지 찍어놨을까. 우연하게도 필자의 최애 선수 아리츠 아두리스가 찍혔다.



그렇다면 세상의 수많은 팀들 중에서도 왜 아틀레틱 클럽일까?
 
본래 사람은 누구나 승리를 갈망한다. 승리에 대한 본능은 스포츠에도 적용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한 팀을 응원하기 마련이다. 당장 리그의 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 같은 팀들만 보더라도 메시와 호날두라는 슈퍼스타와 함께 스페인의 패권은 물론 전 세계의 왕좌를 놓고 경쟁하는 팀들인 만큼 라리가 내에서 가장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팀들이다.
 
그 당시 기준으로 두 팀의 팬들은 언제나 경기에서 이기고 언제나 우승하는 팀을 보았을 것이다. 팀이 경기에서 패배할지, 강등당하는 것은 아닐지, 보강은 제대로 할지 걱정 없이 그리고 팀 소식은 항상 누군가가 한국어로 번역해서 가져다주는 걸 읽으며 정말 편한 마음으로 팀을 응원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모든 이점을 뿌리치고 아틀레틱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아틀레틱을 응원하는 혹은 응원하게 된 이유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홍대병이 좀 있는 것 같다. 그 홍대병의 기원은 어릴 때의 기억을 되짚어봐도 언제부터인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언젠가부터 남들이 모두 따라하고 좋아하는 것보다는 나만 아는 것에 손이 가기 시작하던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들이 안 하는 걸 하는 내 모습이 멋져 보여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그냥 날 때부터 반골기질이 강했던 걸까?
 
아무튼, 이런 홍대병 기질이 나를 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도 아닌 아틀레틱 클럽으로 이끈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이유로는 내가 아틀레틱 클럽에 입문하던 시기에 잘하던 팀의 모습을 봐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내가 입문한 2015년에는 지금 감독인 발베르데 감독의 두 번째 재직 시기였는데 그 시즌을 5위라는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게다가 아리츠 아두리스가 노익장을 발휘하여 30대 중반에 리그 20골을 넣는 기염을 토하면서 나의 최애 선수가 되었다. 입문하면서 찾아본 대로 자신들만의 정책을 유지하면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으니 응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시즌에는 발베르데 감독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장기적인 플랜의 미흡함 때문인지 리그 성적도 떨어지고 유로파도 32강에서 키프로스의 아포엘에게 허망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발베르데 감독에게 실망을 많이 했고 다음시즌은 이것보다는 잘 되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밑바닥은 따로 있었다.

발베르데 감독은 16-17 시즌이 끝나자마자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했다. 감독 자리는 B팀 감독이자 구단 레전드인 호세 앙헬 시간다가 맡았다. B팀 감독으로 있으면서 팀을 3부 리그로 강등시켰지만 B팀이 2부에서 살아남는 건 어려운 일이었기에 시간다에 대한 인식이 처음부터 나쁘지는 않았다. 시즌이 개막한 뒤, 경기를 지켜보면 볼수록 팀의 순위는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유로파에서는 이상하리만큼 기대보다 성적을 잘 냈지만 아틀레틱을 응원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경기를 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경기를 보면 감독이 원하는 바를 모르겠고 그저 어영부영 매 라운드를 보내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수험생 생활을 시작하면서 어차피 성적도 안 좋은데 응원을 잠시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운영하던 페이스북 페이지를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틀레틱을 응원하기 시작한 다음 한 시즌이 지난 16-17 시즌, 그 당시 페이스북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페이지라는 시스템을 알게 되었다. 네이버 카페에서 활동하던 나는 소식을 전달해 주시는 다른 유저분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팬들과 소식을 공유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당시 아틀레틱 소식을 퍼오던 중요한 소스가 영문 팬 사이트였기 때문에 기사를 번역하며 수능 대비 영어공부도 하고 서포팅도 하고 일석이조라고 느껴졌다.

2017년 개설한 페이스북 페이지, 지금은 트위터로 옮긴 상태이다.



그렇게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고 축구 커뮤니티 이곳저곳에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면서 남는 틈에 기사를 번역하고 아틀레틱과 관련된 이슈가 있으면 축구 커뮤니티나 다른 페이지에 방문하여 얼굴도 좀 비추면서 팔로워 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활동하다 보니 나름 페이스북 축구팬들 사이에서 아틀레틱의 이름도 알리고 여러 연합체에 들어가며 인맥도 쌓게 되었다.

고3 생활이 중반으로 흘러갈 즈음, 팀을 16위로 추락시켰던 시간다는 시즌이 끝나고 떠나갔다. 셀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아틀레틱의 광인 비엘사의 수제자인 에두아르도 베리소가 팀에 부임했다.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베리소가 비엘사의 기적을 다시 한번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베리소 축구는 기대와 다르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팀은 저번 시즌처럼 중하위권을 맴돌았고 결국 시즌 중반에 경질되고 말았다.

그다음 감독으로 부임한 가리타노 감독은 팀을 잘 수습했고 팀을 유럽대항전 문턱까지 올려놓았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은 리그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다. 가리타노 감독은 신기하게 토너먼트에서 강했고 팀을 2년 연속이나 국왕컵 결승에 올려놓았다. 코로나19로 인해 같은 해에 결승을 두 번이나 치르게 됐지만 그 상대가 바르셀로나 그리고 최대 라이벌 레알 소시에다드라는 점이, 110년 만에 이뤄지는 국왕컵 바스크 더비라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가리타노 감독은 두 결승전에서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 비록 군 복무 중이라 경기는 보지 못했지만 약 40년 만에 국왕컵을 들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있었고 가리타노 감독이 그 기대를 깨트려버렸지만 팬으로서 다시 한번 아틀레틱에 희망을 가지게  만들었던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 같다.

군 전역을 하고 군적금을 받았을 때 나는 이 돈을 어디에 사용할지 고민이 많았다.

교환학생 자금에 보탤지 아니면 겨울 방학 때 스페인 현지를 방문할 것인지 두 선택지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

이성적으로는 교환 학생을 도전하는데 보태는 게 맞았겠지만  내 감성이 강했던 걸까 내 이성이 나약했던 걸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1월에 출발하는 스페인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버렸다.

나를 유럽으로 실어주었던 비행기

 


스페인으로 출발하기 전날 기왕 빌바오 현지까지 가는데 선수들의 사인은 무조건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틀레틱 레딧, 트위터를 돌아다니며 한국에서 빌바오까지 날아가는 나의 사정을 설명하며 사인을 어디서 받을 수 있을지 수소문했다.

인터넷의 아틀레틱 팬들은 한국에서 방문하는 나의 이야기에 놀라워하며 훈련장 앞에서 훈련 전이나 훈련 후에 기다리면 선수들이 나오거나 들어가면서 사인을 해준다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나는 훈련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빌바오 방문 계획을 세워둔 뒤 스페인의 다른 지역을 돌아다니며 관광을 하고 있던 중 트위터 DM 알람을 받았다.
DM 올 사람이 없는데 무슨 연락인가 싶어 트위터 어플을 켠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했다.

바로 아틀레틱 공식 트위터 계정에서 DM이 온 것이었다.

사인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그래서 사인을 구해다 주려고 하는데 이름과 어쩌다 팬이 되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공트 관리자와 열심히 문자를 주고받았다. 레알 전을 보러 산마메스에 간다고 말하니 경기 전에 홍보팀 관리자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고 말했다.

그렇게 꿈만 같은 대화를 나누고 나는 빌바오로 향했다.

빌바오에 도착한 당일 다행히도 훈련일정이 오후에 잡혀있어서 여유롭게 짐을 놓고 점심을 먹고 훈련장 앞으로 향했다. 혹시나 모를 변수에 대비하여 몇 시간 일찍 가서 기다렸다.  훈련 시작 한 시간 전쯤 되니 선수들이 하나둘씩 훈련장으로 오기 시작했다. 발베르데 감독을 시작으로 선수들이 올 때마다 나는 내가 마주한 상황이 현실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그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몇 년 동안 TV로만 보던 사람들이 내 눈앞에 있고 내 유니폼에 사인을 해주는 상황, 독자 여러분들이라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 아닐까 싶다.

사인 받는 모습



이렇게 꿈만 같던 순간을 지나 경기 당일이 되었다. 홍보팀 담당자를 만나 내 자리를 알려주고 하프타임 때 담당자분이 자리로 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별일 아닌 듯이 그다음 날 구단 사무실을 방문해 볼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다. 놀라운 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프타임 때 홍보팀 담당자가 자리에 오더니 잠깐 따라오더라고 했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디로 데려가냐고 물어보니 씩 웃으면서 그냥 따라오라고 했다. 나를 데려간 곳은 바로 피치 위였고 트위터에 올릴 영상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바로 가능하다고 말했고 나는 담당자분으로부터 한 종이봉투를 받았다.

그 종이봉투에는 선수들의 사인과 함께 스페인어로 (내 이름)을 위해, 아틀레틱의 친구들이라고 적혀있었고 그 안에는 그 시기에 출시한 50년대 레트로 티셔츠가 들어있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감동의 연속이었다.

경기 다음날 구단 사무실을 방문했다. 공식 트위터 관리자 분이 구단 사무실을 소개해줬다. 사무실을 다 보고 나오기 전에 어떻게 나를 알고 연락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관리자가 말하길, "우리는 가끔씩 바스크 지방 바깥에도 팬들이 있다는 사실을 까먹어요, 하지만 당신같이 세계 곳곳에서 오는 팬들 덕분에 우리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전 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 줘요. 경기가 많은 달이라 바빴지만 레딧에서 한국에서 직접 와서 사인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보고 바로 모든 일을 제쳐두고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이런 말을 듣고 감동하지 않겠는가. 진짜 스페인 여행을 통해 평생 팀에 충성하게 될 동기를 만들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생각을 해보니 구단으로부터 이렇게 큰 혜택을 받았는데 나도 팬으로서 구단을 위해 우리가 정말로 많이 응원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이야기하다가 나온 공식 팬클럽, 페냐가 생각이 났다.

한국에 아틀레틱 팬들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 개개인의 팀에 대한 충성심은 높은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이 팬들을 모아 구단으로부터 한국에도 열혈팬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는다면 그것이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네이버 팬카페에다가 회원들의 의사를 물어보았다. 10명이 넘는 인원들이 페냐 창설에 동의하는 의견을 내비쳤고 나는 이 정도면 충분히 페냐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인원들이 모였다고 생각했다. 한국팬들의 의견을 확인한 후 구단에 어떻게 페냐를 만드는지 문의를 해보았다. 게다가 페냐를 만들기 위해 의견을 모은 팬분 중 한 분은 출장 중임에도 시간을 내주어 구단 사무실을 방문하여 담당자와 절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구단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노력을 이해했는지 이역만리 먼 곳의 팬이라 무시하지 않고 상세하게 절차를 알려주었다.

한국 팬들이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은 비영리 단체를 만들고 그에 대한 증명서를 구단에 제출하는 것뿐이었다. 비영리 단체 설립이라는 생소한 일을 하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인터넷에 찾아보아도 단편적인 정보밖에 안 나오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진전이 될 리가 없었다.

결국 논의 끝에 법무사를 찾아가 단체 설립에 대한 도움을 받기로 결정하고 카페 매니저님의 주도하에 모금을 진행했다. 다행히도 페냐 설립에 대해 한국 팬분들은 열정을 보여주셨고 단체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카페 매니저님이 가장 많은 돈을 쾌척하고 법무사 사무실을 방문하여 절차를 진행하며 페냐 설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단체 설립을 국내에서 마치고 나는 구단과 연락하며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했다. 페냐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구단뿐만 아니라 해외의 여러 페냐들의 관리자 하고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한국에도 페냐를 만들 만큼 팬들이 열정적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그렇게 23년 10월, 공식 홈페이지에 드디어 전 세계의 페냐 목록 중에 우리 페냐의 이름이 올라가게 되었다. 회장은 기존 팬카페의 매니저님이 맡기로 했고 부회장 자리는 부매니저를 하던 나에게 돌아왔다.



정말로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지만 나의 목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른 페냐들은 페냐를 설립한 뒤 자신들의 소감이나 목표를 동영상을 촬영해서 구단에 전달하고 공식 게시물을 통해 설립을 알린다. 아쉽게도 한국 페냐의 회원들은 직접 만나서 활동에 대해서는 참여율이 저조해서 설립에 대한 영상을 찍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나 혼자서 소감 영상을 만든다는 말인가.

몇 달 동안 페냐 간부진이 참여를 독려한 덕분에 영상 출현을 원하시는 분들이 몇 분 모여 영상 촬영을 했고 드디어 공식 홈페이지와 SNS 계정을 통해 우리 페냐 설립을 알리는 게시물이 올라갔다. 세계 곳곳의 아틀레틱 팬들이 남긴 페냐의 탄생을 축하하는 댓글을 보면서 다시 한번 페냐 설립에 대한 뿌듯함을 느꼈다.

페냐 설립을 알리는 타이밍이 좋았던 것 같다. 팀은 국왕컵 결승을 앞두고 있었고 이렇게 중요한 경기를 신생 페냐에서는 어떻게 준비하고 받아들이는지 궁금해하는 언론사가 몇 개 있었다. 현지에 우리를 알릴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 열심히 인터뷰를 준비해서 보냈지만 실제로 신문에 실린 곳은 몇 군데 없었다.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국왕컵 결승을 단관을 원한다는 연락을 현지인으로부터 받았다. 한국에서 잠깐 연수를 받고 있는 대학생인데 약 30명을 데리고 한국 팬들과 축구를 보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규모에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연락을 주고 우리 쪽에서 30명 이상 수용가능한 바를 빌리는데 필요한 요건들을 다 채우고 와주었다. 네이버 카페시절부터 포함하면 아틀레틱 국내 팬덤 역사상 최초의 단관이었는데 첫 단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끝났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따로 단관 준비과정부터 소감까지 다른 게시글로 정리해보려 한다.

이렇게 내가 어떻게 축구에 빠져들게 되었고 축구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정리해 보았다. 쓰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분량이 나와서 스스로도 당황스럽지만 아직 이야기를 다한 게 아니다.

필자는 국내축구의 수원삼성 블루윙즈라는 팀의 팬이다. 우리나라에서 해외축구부터 입문한 사람들은 보통 해외축구만 계속 챙겨보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해외축구를 몇 년간 보고 나서도 K리그와 수원 삼성의 매력에 빠져 5년 동안 거의 매주 직관을 다니며 팀을 응원하고 있다. 수원 삼성과 나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지만 아틀레틱 클럽과는 다른 이야기라 연관 지어 써 내려가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별개의 게시글로 소개할 생각이다.

다시 돌아와서, 축구를 싫어하던 소년이 이렇게 이역만리 타향에 있는 팀을 좋아하고 그 팀의 공식 팬클럽 부회장까지 역임하는 이야기는 지금 글을 쓰는 본인이 봐도 찾기 어려운 사례이다. 여러분도 팀을 응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정말 많다. 스스로의 잠재력을 믿고 내 응원팀을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은 과감하게 시도해 보자, 언젠가는 당신의 상상, 아니면 그 이상으로 결과가 돌아올 것이다.

여러분들의 꿈을 응원하며 글을 마치겠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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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혐오자'에서 '구단 공식 팬클럽 부회장'까지, 축구 보는 한 청년의 이야기.

"가족이 된걸 환영합니다! 페냐 아틀레틱 클럽 코리아!"  이 한 문장이 아틀레틱 클럽 공식 트위터에 올라온 걸 본 그 순간 머릿속에서는 지난 9년간 팬으로서 활동한 나날들이 스쳐 지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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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일반 칼럼 

 

Ⅲ-Ⅰ. [예비 축잘알을 위한 축구 규칙 알아보기] 요코하마 수비수가 페널티킥을 내주고 퇴장 당한 이유

- 조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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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잘알’은 ‘축구를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축구팬에게 가장 명예로운 별명 중 하나다. 그리고 축구 규칙을 잘 아는 것은 ‘축잘알’이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여러분이 축구 규칙을 잘 모르는 ‘예비 축잘알’이라면, 이 글을 읽고 완벽한 ‘축잘알’이 되길 바란다.

지난 4월 24일, 요코하마 마리노스와 울산 현대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이 열렸다. 요코하마가 3-2로 승리하면서 1,2차전 합산 스코어를 3:3으로 돌렸고 승부차기에서 5-4로 울산을 제압하고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장면은 전반 38분경에 나왔다. 울산의 역습 상황 도중 요코하마 수비수 카미지마 타쿠미가 자신의 페널티 박스 안에서 핸드볼 파울을 범하자 주심은 페널티킥을 선언함과 동시에 타쿠미에게 다이렉트 레드카드를 꺼냈다.
 
일반적으로 페널티킥과 다이렉트 퇴장을 동시에 주는 경우는 흔치 않기에 팬들 사이에서는 이 판정이 가혹하다거나, 혹은 오심이라는 주장까지도 나왔다. 그렇다면 이 판정은 과연 오심일까? 아니라면 주심은 왜 이런 판정을 했을까?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에 가면 IFAB(국제축구평의회)에서 배부한 규정집을 볼 수 있다. 해당 규정집(편의 상 번역본을 사용하겠다)의 95페이지 ‘퇴장성 반칙 부분’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핸드볼 반칙으로 상대팀의 득점 또는 명백한 득점 기회를 저지한 경우’
 
또 그 아래의 ‘득점 또는 명백한 득점 기회의 저지 (DOGSO)’ 부분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선수가 핸드볼 반칙으로 상대팀의 득점 또는 명백한 득점 기회를 저지했을 때는 반칙이 어디서 일어났는지에 상관없이 그 선수는 퇴장당한다 (자신의 페널티에어리어 내에 있는 골키퍼는 예외로 한다).'
 
이번 상황에서는 바로 위의 두 가지 규정이 적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명백한 득점 기회'는 어떤 상황일까? '명백한 득점 기회'는 반칙과 골문 사이의 거리, 전체적인 플레이의 방향, 볼의 컨트롤을 유지하거나 획득할 가능성, 수비수들의 위치와 숫자를 따지게 되어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엄원상은 골문과 가까운 거리에서 골문을 향해 드리블을 하고 있었고, 공을 명백하게 컨트롤하고 있었으며, 그를 막을 수 있는 요코하마 수비수는 없었고, 오히려 팀 동료 주민규가 그를 돕기 위해 유리한 위치로 달려가고 있었다.
 
즉 엄원상에 온 기회는 명백한 득점 기회로 보기 충분하며 이를 저지한 카미지마 타쿠미의 행위가 핸드볼 반칙이라면 퇴장을 선언한 주심의 판정은 정확한 것이다. 그렇다면 타쿠미의 행위는 핸드볼 반칙이 맞을까?

다른 각도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타쿠미가 의도를 가지고 팔을 사용해 공을 터치했음을, 혹은 최소한 팔을 이용해 신체를 부자연스럽게 확대하긴 했음을 충분하게 파악할 수 있다. 즉 타쿠미의 행동은 핸드볼 파울이 맞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종합하자면, 필자의 사견으로 봤을 때 타쿠미의 행동은 명백한 득점 기회를 저지한 핸드볼 반칙에 정확히 해당하고, 이에 대해 울산의 페널티킥과 타쿠미의 다이렉트 퇴장을 선언한 주심의 판정은 의심의 여지없는 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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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축잘알을 위한 축구 규칙 알아보기] 요코하마 수비수가 페널티킥을 내주고 퇴장 당한 이유

‘축잘알’은 ‘축구를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축구팬에게 가장 명예로운 별명 중 하나다. 그리고 축구 규칙을 잘 아는 것은 ‘축잘알’이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여러분이 축구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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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Ⅱ. [유럽축구여행기 - 1] 마인츠 MEWA 아레나 방문

-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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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첫 축구 관련 여행지는 마인츠의 MEWA(메바) 아레나이다.

이재성 선수가 뛰고 있는 1.FSV 마인츠 05의 홈구장으로, 마인츠 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2011년 개장한 메바 아레나는, 총 3만 4천 명의 관중을 수용 가능한 경기장이다.

독일 리그들의 관중 동원력을 감안했을 때 큰 경기장이라 보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전주월드컵경기장과 비슷한 규모이다.

마인츠 트램

메바 아레나는 위치는 상당히 외진 곳에 있지만 접근하기 불편하지는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약 50분 S반 열차를 타고 달려 마인츠 중앙역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트램을 타고 약 15분 정도면 메바 아레나 부근 대학교에 도착한다.

물론 경기장이 완전 초원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보니, 트램에서 내려 인도가 없는 도롯가를 3분정도 걸어야 했다.

주변이 공사 중이라 걷기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다.

경기장을 본 첫 인상은 외지다는 인상 뿐이었다.

풀밭 한가운데 지어진 경기장이다 보니, 트램 역이 있는 대학교 캠퍼스에서 바라봤을 때,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경기장만 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사진에서 보이듯, 경기장 주변이라 도로는 넓은데 외진 지역이라 경기가 없는 날에는 교통량이 거의 제로 수준이라 자전거를 타러 나온 시민들이 많았다.

주차장 입구

자전거 이용을 장려하기 위해, 경기장 주변 모든 곳에 이와 같은 자전거 주차장이 있었다.

메바 아레나의 좌석 안내도.

여느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울트라스의 스티커로 뒤덮여 있었다.

동쪽 스탠드(그림 기준 왼쪽)에 원정석이 마련되어 있고, 서쪽 스탠드가 홈 응원석인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장은 지어진 지 오래 되지 않은 만큼 깔끔했다.

통유리와 붉은 상단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었다.

경기장 주변도 경기 없는 날에는 공원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경기장의 모든 출입구는 위의 사진과 같이 철조망으로 막혀 있어서 경기장 내부에 진입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경기장 내부가 보이긴 했다.

경기장 주변 컨테이너에 붙어있던 스티커와 낙서들.

폭력적인 멘트들이 눈길을 끌었고, ANTI KL(카이저슬라우테른) 스티커에서 마인츠와 카이저슬라우테른 서포터즈의 앙숙 관계를 추론해 볼 수 있었다.

좌측 상단에 세상을 떠난 힙합 아티스트들을 추모하는 문구들도 눈길을 끌었다.

경기장 내부는 이렇게나마 볼 수 있었다.

크게 특이한 점은 없었다.

 

스탠드 바깥쪽은 마인츠와 관련된 그래피티로 뒤덮혀 있었고, 마인츠의 옛날 유니폼들이 걸려 있는 곳도 있었다.

경기장 뒷편으로 오니 정말 깡촌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바로 옆이 밭이어서 농기계들도 볼 수 있었다.

경기장 바깥에는 울트라스의 스티커가 붙어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스티커의 종류가 굉장히 다양한 것으로 보아 여러 소모임이 존재하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었다.

경기장 옆쪽에서 어린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주변도 깔끔하게 정비되어있고, 푸른 들판이 있는데다 농구대와 클레이코트가 있고, 주차 자리도 널널해서 어린 아이를 동반한 가족의 피크닉 장소로 좋아 보였다.

북쪽 벽면에는 서포터즈가 그려져 있었다.

역시 프로 구단의 존재 이유는 서포터즈다.

 

이 벽면이 있는 북쪽에 팬샵도 있었다.

경기장 위치가 너무 외지다보니 경기 없는 날에는 장사가 안 될 것 같았다.

 

팬샵 내부에 물품은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았다.

유니폼, 의류와 머플러가 주를 이루었고,

파티용품과 식기류 등이 있었다.

굿즈로 뱃지를 구매하고자 했는데 찾을 수 없었다.

이재성 선수의 친필사인 유니폼을 650유로에 팔고 있었다.

한국 돈 95만원이다.

유니폼을 사서 이재성 선수를 만나기 위해 발품 파는게 훨씬 싸게 먹하겠다고 생각했다.

 

팬샵 바깥에는 마인츠 로고가 있었다.

이렇게 마인츠의 MEWA 아레나를 한 바퀴 돌아보고 팬샵에도 방문해 보았다.

수용 인원이 그리 많지 않은 경기장임에도 스탠드의 규모가 상당히 커서 놀랐다.

경기장의 위치가 많이 아쉽긴 하지만, 경기장도 깔끔하고 예쁘게 지어져 있어서 만족스러운 방문이었다.

이재성 선수의 좋은 활약과 마인츠의 1부 잔류를 기원하며 글을 마치겠다.

 

 

원문 링크

 

 

유럽 축구 여행 1 - 마인츠 MEWA 아레나 방문

2024.05.02 유럽에서 첫 축구 관련 여행지는 마인츠의 MEWA(메바) 아레나이다. 이재성 선수가 뛰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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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탑 10

- 박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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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위 알레산드로 네스타

 


생년월일: 1976년 3월 19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87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SS 라치오

'아트 디펜더'

우아하고 지능적인 수비수로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인 태클과 뛰어난 수비 지능으로 유리한 위치를 먼저 선점하며 상대방의 슈팅 각도를 좁혔으며 빌드업 능력도 뛰어난 우아한 수비수였다.

라치오에서 데뷔한 네스타는 비안코세레스티 군단에서 1997-98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시작으로 1998-99 시즌에는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했으며 여름에는 UEFA 슈퍼컵에서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승리했으며 1999-2000 시즌에는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를 모두 제패하며 자타공인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군림했고 AC 밀란으로 이적한 뒤에도 세리에 A와 UEFA 챔피언스리그를 각각 2회 우승했으며 2002-03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다만 네스타는 아주리에서는 국가대항전 도중 부상으로 자주 낙마하는 등 운이 나쁜 편이었는데 그럼에도 UEFA 유로 2000에서는 칸나바로와 함께 짠물 수비의 진수를 보여주며 팀을 결승에 올리며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으며 대회 도중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2006 독일 월드컵에서도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라치오 시절에 1998년 세리에 A 올해의 영 플레이어에 선정되었고 2000-01 시즌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된 네스타는 세리에 A 올해의 수비수에 2000년부터 2003년까지 4년 연속으로 선정되었으며 UEFA 올해의 팀에 4회 선정되었고 2000년에는 라치오에서의 도메스틱 더블과 유로에서 팀을 결승에 올려놓은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발롱도르 투표에서 5위에 올랐다.



9위 세르히오 라모스

 


생년월일: 1986년 3월 30일
국적: 스페인
신체조건: 키 184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장군'

스페인 역대 최고의 수비수를 넘어 21세기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 선수로 넓은 수비 커버 범위로 측면 수비수가 오버래핑한 자리를 지키며 빠른 스피드까지 지녔으며 특히 중요한 순간에는 뛰어난 헤딩 능력을 활용한 득점력이 일품이었다.

그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이룬 성과는 경이로운 수준을 넘어서는데 2010년대 수비수에 관련된 상을 모조리 휩쓸었으며 레알 마드리드에서 이룬 팀 커리어도 라리가 5회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4회 우승을 기록했음은 물론 그 과정에서도 두 번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헤딩 득점을 했을 정도로 중요한 경기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아르마다 군단에서도 시대를 대표하는 센터백다운 퍼포먼스를 보여준 세르히오 라모스는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도 2006 독일 월드컵에 처음 스쿼드에 들었으며 이후 주전으로 도약한 뒤에는 유로 2008, 2010 남아공 월드컵, 유로 2012를 모두 석권하며 메이저 대회 3연패를 이뤄냈으며 이후에도 2018 러시아 월드컵 때까지는 주전으로 활약했고 A매치 180경기에 나서며 스페인 대표팀 통산 A매치 최다 출전자의 반열에 오른다.

2010년대 최고의 수비수답게 상복도 대단했던 라모스는 클럽에서는 UEFA 올해의 팀 9회 선정, 라리가 올해의 수비수 5회 수상, 챔피언스리그 올해의 스쿼드와 ESM 올해의 팀 각 4회 선정, 그리고 UEFA 올해의 수비수 2회 수상이라는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했고 대표팀에서도 2010 남아공 월드컵 드림팀과 2012 UEFA 유로 올스타 스쿼드에 포함되며 스페인 대표팀의 메이저 대회 3연패의 핵심 멤버 중 하나로 명성을 날렸다.

 


8위 로날드 쿠만

 


생년월일: 1963년 3월 21일
국적: 네덜란드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득점왕 수비수'

골 넣는 수비수로 유명했던 수비수로 다수의 시즌 동안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던 리베로로 기본적인 수비 능력부터 우수한 빌드업 능력과 강력한 킥력을 활용한 득점력과 찬스 메이킹에 능한 공격형 수비수였다.

아인트호벤과 바르셀로나에서 전성기를 보냈는데 전자의 클럽에서는 1988년에는 네덜란드 리그에서 무려 21골이나 득점해 수비수임에도 득점 3위에 올랐으며 아인트호벤의 트레블과 네덜란드의 유로 우승을 동시에 이뤄냈고 바르셀로나에서는 라리가 4연패를 이뤄냈음은 물론 1991-92 시즌에는 마지막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냈는데 그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연장전에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기가 막힌 프리킥을 직접 득점했다. 발롱도르 탑 20 안에 세 번이나 들었으며 10 시즌 연속 시즌 공식전 두 자릿수 골을 기록했고 특히 1993-94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에서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

대표팀에서도 리베로를 맡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쿠만은 오랑예 군단의 유니폼을 입고 두 차례의 유럽 선수권 대회와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특히 UEFA 유로 88에서는 팀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도 선정되었고 클럽에서의 트레블과 더해 쿠만은 1988년에 발롱도르 투표에서 5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보여줬으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7위 마티아스 잠머

 


생년월일: 1967년 9월 5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마지막 리베로'

마지막 리베로라 불리는 사나이로 스리백 시스템에서 오프사이드 트랩은 불가능하다는 세간의 편견을 깨며 스리 백 시스템에서도 오프사이드 트랩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축구 지능과 수비 조율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전성기는 짧지만 그 고점은 가히 베켄바우어 다음가는 선수였던 잠머는 히츠펠트 체제의 도르트문트에서 분데스리가와 DFL슈퍼컵 2연패를 이뤄냈으며 1996-97 시즌에는 유벤투스를 꺾고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동독 대표팀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하다 통일 이후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를 거쳐 리베로로 활약했던 잠머는 리베로로 활약한 UEFA 유로에 1996에서 대표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여 녹슨 전차군단이라 조롱받았던 독일을 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MVP를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으나 이후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큰 부상을 당해 은퇴하면서 독일 축구는 한동안 암흑기를 겪었다.

잠머는 분데스리가에서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1995년 독일 올해의 선수와 발롱도르 9위에 올랐으며 1996년에는 디 만샤프트의 앙리 들로네를 드는데 크게 기여해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초신성 호나우두를 간신히 따돌리고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6위 바비 무어

 


생년월일: 1941년 4월 12일
국적: 잉글랜드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종가의 상징'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자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 빼어나면서 안정적인 수비력은 기본이고 강력한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리더십과 뛰어난 롱 패스를 활용한 플레이메이킹 능력, 타고난 전술안 등 수비수로서 필요한 덕목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의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이끌었으며 대표팀에서도 1966 잉글랜드 월드컵의 우승과 유로 1968 3위를 기록하는 등, 무어가 주장으로 이끌던 시절의 잉글랜드는 다른 시대와는 달리 매우 잘 나갔으며 무어가 대표팀에서 물러나자 잉글랜드 대표팀은 일시적으로 몰락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다.

바비 무어는 1970년에는 월드컵에서 펠레, 게르트 뮐러와 같은 선수들을 잘 막아낸 활약을 인정받아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에 올랐으며 사후인 1994년에 선정한 피파 월드컵 올타임 팀에 선정되었고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최초로 헌액되었다.



5위 프랑코 바레시

 


생년월일: 1960년 5월 8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AC 밀란

'로쏘네리의 심장'

AC 밀란과 아주리의 위대한 캡틴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한 명으로 뛰어난 수비라인 통솔 능력과 빠른 스피드, 정확한 롱패스, 몸을 사리지 않는 태클을 모두 겸비한 완벽한 수비수였다.

AC 밀란 통산 출전 2위에 랭크된 프랑코 바레시는 암흑기 시절 세리에 B 우승을 두 번 이뤄내며 팀을 승격시켰으며 이후 베를루스코니에게 인수된 이후 사키의 밀란 제너레이션 기간에는 무패 우승을 포함해 세리에 A 6회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수비수임에도 1989-90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옹즈 몽디알이 뽑은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3년 연속 선정되었다.

바레시는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지만 가에타노 시레아라는 큰 벽에 의해 아주리에서는 다소 늦게 주전 자리를 차지했으며 주전 멤버로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지 못해 대표팀 활약이 시레아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결승전에서 말디니와 함께 호마리우, 베베투 라인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대표팀에서도 시레아 못지않은 퍼포먼스를 충분히 보여줬다.

이렇듯 클럽과 대표팀을 가리지 않고 최정상의 실력을 뽐낸 바레시는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일곱 번 선정되어 1989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를 차지하며 포디움에 들었다.



4위 다니엘 파사레야

 


생년월일: 1953년 5월 25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엠페라도르'

완벽한 수비 능력과 훌륭한 수비라인 지휘 능력, 그리고 강력한 킥력을 활용해 득점과 찬스 메이킹마저 담당했으며 173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제공권 장악 능력이 오히려 강점에 속하는 만능 디펜더로 남미 축구 역사상 최고의 리베로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리버 플레이트와 피오렌티나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파사레야는 전자의 구단에서는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전기리그 4회 우승과 후기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5 시즌과 1979 시즌에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모두 제패했고 1976년에는 35경기 24골이라는 공격수라 해도 믿을 득점력을 보여주며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유럽 무대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파사레야는 피오렌티나에서는 마지막 시즌인 1985-86 시즌에는 수비수임에도 무려 11골이나 득점했는데 이는 마테라치가 갱신하기 전까지 세리에 A 수비수 시즌 최다골을 기록하며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세리에 A 외국인 선수 랭킹 2위에 2회 올랐다. 실제로 피오렌티나 시절은 물론 말년인 인테르 시절에도 좋음 모습을 보였다.

파사레야는 라 알비셀레스테에서도 위대한 주장으로 이름을 남겼는데 다소 논란이 많은 대회지만 주장으로써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의 우승을 차지했고 개인적으로도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할 예정이었지만 대회 직전 식중독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로 벤치로 내려가는 비극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월드컵 2회 우승이라는 영예를 누렸으며 은퇴 이후 2015년에는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선정 아르헨티나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3위 호세 나사치

 


생년월일: 1901년 5월 24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베야 비스타

'위대한 사령관'

우루과이를 넘어 축구 역사에서도 최고의 수비수 반열에 있는 선수로 당시로서는 굉장한 거구로 압도적인 힘과 영리한 위치 선정으로 상대 공격수를 잡아먹었다. 그의 튼튼한 수비력에 우루과이의 유명한 소설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X선조차 그의 수비를 뚫지 못할 것이라는 찬사를 보냈으며 리더십도 뛰어나 위대한 사령관이라 불렸다.

월드컵이 탄생하기 이전 세계 최고의 축구 권위 대회인 올림픽에서 주전 멤버로 두 번이나 금메달을 땄으며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네 번이나 우승했다. 그리고 초대 월드컵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공격수들을 제치고 MVP를 수상했으며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네 번 우승했으며 1923년과 1935년, 두 번이나 MVP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였다.

소속팀이 상대적으로 약체였던 베야 비스타였으나 나사치의 맹활약으로 수비적인 부분에서는 좋은 지표를 보여줬다. 특히 1932 시즌에 베야 비스타는 리그에서 35실점을 기록하던 베야 비스타가 호세 나사치가 떠난 1933 시즌엔 무려 61실점과 리그 꼴지를 기록하며 무너졌다. 반면 클루브 나시오날은 1932년에 리그 3위와 34실점을 기록했지만 나사치가 이적한 1933년에는 리그 우승은 물론 27경기에서 고작 10실점만 기록하는 탄탄한 팀으로 변모한다. 이후 나사치는 나시오날에서 리그 4연패를 기록하며 화려한 커리어를 추가한다.



2위 엘리아스 피게로아

 


생년월일: 1946년 10월 25일
국적: 칠레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SC 인테르나시오나우

'유럽의 베켄바우어에 대한 남미의 대답'

유럽의 베켄바우어에 대한 남미의 대답이라 평가받았던 리베로로 공수 양면에서 완벽했으며 큰 체격을 활용한 제공권 장악 능력은 실로 감탄을 할 만했으며 큰 키에도 몸이 굉장히 유연했고 아주 민첩했으며 수비라인 조율 능력도 뛰어나 마티아스 잠머와 함께 오프사이드 트랩을 가장 잘 구사하던 선수다. 그리고 공격 전개 능력은 물론 세트피스 상황에서 헤딩 득점에도 능했다. 이를 본 네우송 로드리게스라는 브라질 축구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백작처럼 우아하고 벵갈호랑이처럼 위험했다고 전해지는 완벽한 수비수였다.

페냐롤에서 세계적인 수비수로 성장한 피게로아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2연패를 이뤄냈고 1969년에는 역대 인터콘티넨탈 우승팀끼리 최강자를 가리는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스 슈퍼컵을 우승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브라질의 인테르나시오날에서는 다섯 번의 주립 리그와 두 번의 전국 리그 우승에 공헌하며 남미 올해의 선수상 1위 3연패와 3위 한 번이라는 대기록을 기록했다.

칠레 대표팀의 암흑기에 활약했던 선수라 대표팀 커리어가 다소 빈약한데 1974 서독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서독을 만나서 엄청난 수비력을 선보였는데 파울을 범하지 않고도 깔끔한 수비를 펼치면서도 양 팀 선수 중 가장 많은 인터셉트와 태클을 기록했다. 피게로아는 특히 게르트 뮐러를 전담 마킹했는데, 피지컬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기술적인 부분으로도 뮐러를 완전히 압도했음은 물론 천재적인 수비라인 지휘 능력으로 게르트 뮐러에게 오프사이드 3회라는 굴욕을 선사했다. 비록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피게로아 개인은 다수의 매체에서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1위 프란츠 베켄바우어

 


생년월일: 1945년 9월 11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데어 카이저'

부정할 수 없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수비 라인에서의 자유인을 넘어 전 경기장을 자유롭게 누비는 독일식 리베로의 시조로 서독 대표팀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그리고 당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바비 찰튼을 지워냈을 정도로 대인 마킹에도 능했다.

상술한 능력을 바탕으로 독일 내에서도 평범한 클럽이었던 바이에른 뮌헨이 독일 최고의 클럽으로 올라서는데 크게 공헌하며 분데스리가와 DFB포칼에서 각각 4회 우승을 달성했고 유럽 대항전에서도 컵 위너스컵 우승을 시작으로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뤄냈으며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12회 선정되었다.

베켄바우어의 맹활약은 디 만샤프트에서도 이어졌는데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야신을 상대로 중거리 슈팅으로 득점하거나 바비 찰튼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월드컵 신인상에 올랐으며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준결승전에서 만난 이탈리아를 상대로 쇄골이 다치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풀타임으로 경기를 마치며 철인의 풍모를 보여줬다.

1970년대에 들어서 리베로로 출전한 1972 유로에서는 독일식 리베로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유로 우승을 이끌어 트레블을 이룬 크루이프를 밀어내고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팀의 우승에 크게 공헌했으나 크루이프에 밀려 월드컵 실버볼을 받았고 1976 유로에서는 팀의 결승행을 이끌었고 비록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대단한 퍼포먼스로 복수의 언론으로부터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 27회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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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Top 10

주의사항* 작성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설득하셔도 바꿀 생각 없습니다.*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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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여론조사

 

FC 서울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데얀은 들어갈 수 있는가?

 

인터뷰어: 박수용

 

설문조사 결과

참가자 15명 中: 찬성 6명, 반대 9명

 


Ⅳ-Ⅰ. 배경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 그리고 팬들이 사랑하는 선수, 이 두 명제는 보통 동일한 경우가 많지만 첫 번째 명제의 선수가 라이벌팀으로 이적을 감행하거나 꼭 라이벌 팀이 아니더라도 이별 과정에서 좋지 못했으면 루이스 피구, 다비드 알라바, 숄 캠벨과 같이 양립하지 않는 명제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두 명제가 양립하지 못한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극동아시아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연고로 하는 FC 서울의 레전드 데얀 다먀노비치다. 데얀은 몰리나와 함께 데몰리션이라 불리는 K리그 역사상 최고급 공격 듀오를 구성하며 K리그 3회 우승 및 2010년 리그컵 우승과 2013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준우승과 같은 굵직한 성과를 냈고 데얀 개인도 K리그 베스트 4년 연속 선정, AFC 챔피언스리그 대회 올스타팀 2회 선정 및 K리그 득점왕 3회 수상을 이뤄냈으며 2012년에는 K리그 우승, 득점왕, MVP, 대회 베스트 일레븐, K리그 팬타스틱 플레이어를 모두 석권하는 영광을 누렸다. 당연하게도 FC 서울 통산 최다 득점자이자 통산 출전 부문에서도 3위에 랭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선홍 감독과의 불화로 해외 다른 클럽 및 K리그의 강호 울산 현대의 이적 제안을 무시하고 FC 서울의 라이벌이었던 수원 삼성으로 떠났기에 대다수의 팬은 그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선수 개인은 여전히 서울을 떠나서도 서울에 애정을 보이고 있지만 FC 서울 팬들은 그 애정을 위선으로 치부하고 있다.

최고의 활약, 그렇지만 최악의 민심이 이보다 더 갈렸던 순간이 축구사에 얼마나 있던가? 그렇기에 'FC 서울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그가 입성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를 테마와 연계하기 좋다고 생각해 추진했다.

(※ 하술할 인터뷰에서 Q는 인터뷰어인 FCU 회장 박수용이고 A는 인터뷰 대상이다.)

 


Ⅳ-Ⅱ. 여부가 있는가? 데얀은 당연하게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자격이 있다.

 

강다민 의견

 

- 데얀의 기여도는 무시하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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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FC 서울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데얀은 들어가야 할 것인가?'라는 설문에서 기록을 봐라. 들어간다를 선택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A: 데얀에 대해서 FC 서울 팬들 사이에서 "그는 구단의 레전드다."라는 명제가 갈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데얀이 그동안 서울에서 보여주었던 기여도와 스탯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그러면 명예의 전당 등재에 가장 중요한 기준을 활약상으로 보시는 겁니까?

A: 예 그렇습니다. 데얀이 서울의 최대 라이벌인 수원으로 이적한 원수인 건 맞지만 그동안의 기록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Q: 강다민 군은 라치오의 서포터로 아시는데 현역 라치오 선수 중에서 가장 레전드에 가까운 치로 임모빌레가 로마로 떠나도 그를 구단의 레전드로 인정하실 수 있으십니까?

A: 만약에 임모빌레가 로마로 떠난다면 마음의 한구석에는 원수와도 같다는 생각이 있을 순 있지만 임모빌레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활약상을 생각한다면 전 충분히 구단의 레전드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진중한 답변 감사합니다. 생각 잘 들었습니다.


박영빈 의견

 

- 사사롭게는 데얀의 입성을 바라지 않지만 그가 세운 큰 공은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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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FC 서울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데얀은 들어가야 할 것인가?'라는 설문에서 기록을 봐라. 들어간다를 선택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A: 그렇습니다. FC 서울의 팬 중 한 명인 제 사사로운 감정이랑 팀에서 세운 공로와는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입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박영빈 군도 성과가 주가 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렇다면 혹시 영빈님의 또 다른 응원팀의 맨체스터 시티 빌리 메레데스 역시 시티와 유나이티드 모두 거쳤음에도 들어간 것과 같은 궤라고 생각하십니까?

A: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궤로 맨시티와 맨유에서 모두 좋은 모습을 보인 테베스도, 발렌시아-비야레알의 파레호 역시, 팬이라는 감정에서 나오는 반대와 그 선수 개인이 펼치는 영향력이나 성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논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같은 궤라고 생각합니다.

Q: 진중한 답변 감사합니다. 생각 잘 들었습니다.

 

 


오성윤 의견

 

- 데얀이 있었기에 FC 서울이 현재 국내에서의 높은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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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FC 서울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데얀은 들어가야 할 것인가?'라는 설문에서 기록을 봐라. 들어간다를 선택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A: 데얀이라는 선수가 있었기 때문에 FC서울이 현재의 위치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데얀과 함께 뛰었던, 또 데얀이 있기 전과 후에 FC서울을 위해 헌신하였던 선수들의 기여도도 무시할 수 없으나, K리그와 AFC 챔피언스리그 등에 남긴 데얀의 무시무시한 족적이 FC서울의 위상과 찬란했던 과거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처럼 구단 역사의 굵직한 한 페이지를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말년의 좋지 않은 행보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어느 정도는 존중받을 필요성이 있다고 보는 의견입니다. 미우나 좋으나 그가 FC서울을 위해 공헌했던 것은 사실이니까요.

A: 당연히 데얀의 배은망덕한 행동을 옹호하거나 칭찬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한 팀의 서포터로서 수호신분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또한 FC서울의 서포터는 아니기에 데얀에 대한 원망감을 느끼지 않아 제삼자의 시선에서 보았고, 다름 아닌 '명예'의 전당이기 때문에 데얀의 업적이 말년의 역적과도 같은 행동들을 상쇄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저와 반대의 의견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반대의 의견은 존중하지만 그래도 오성윤 군의 관점은 구단의 위상을 올려준 기여도가 우선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A: 예 그렇습니다.

Q: 그렇다면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오성윤 군이 아스날을 좋아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스날에서 01-02 시즌 더블, 무패우승,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이라는 업적을 세운 애슐리콜이 더 많은 급여를 받고 싶다고 첼시로 이적해 서포터들에게서 큰 비난을 받았던 사건이 있습니다. 만약 아스날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이 애슐리 콜 선수는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A: 콜 역시 들어가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스날의 최전성기 중 한 시대를 함께 했고, 그때의 활약상도 훌륭했으니 데얀과 같은 논리로 그의 업적도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포지션별로 뽑더라도 본인 포지션에서 기량적으로도 기록적으로도 가장 출중한 선수 중 한 명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다만 첼시와 아스날 중 한 클럽의 명예의 전당에만 들어가야만 한다면 첼시 유니폼을 입는 게 맞다고 보네요 하하.

Q: 그래도 애슐리콜은 역시 첼시 레전드에 조금 더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요 하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허경원 의견

 

- 배신으로 인해 팬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더라도 구단 역사에 큰 기여를 했다면 레전드로 대우해 주는 것이 일관적이고 논리적으로 결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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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FC 서울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데얀은 들어가야 할 것인가?'라는 설문에서 기록을 봐라. 들어간다를 선택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A: 물론입니다. 데얀 다먀노비치는 FC 서울에서 184골을 득점하며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팀의 에이스로 3번의 K리그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우승 트로피나 공격포인트와 같은 기록뿐만 아니라 실제 경기력이나 영향력, 퍼포먼스, 기여도 역시 명실상부한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며 K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입니다. 그런 그가 FC 서울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Q: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고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A: 물론 마지막에 구단을 배신하고 라이벌 팀으로 이적한 것은 크나큰 죄가 맞습니다. 그러나 모든 선수, 아니 모든 사람은 공과 과를 모두 쌓는 법입니다. 데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데얀이 서울에서 쌓은 공과 과를 모두 따져봤을 때, 그의 과가 공을 가릴 수 있습니까? 한 구단의 역사에서 어중간한 위치의 선수라면 몰라도, 구단 역사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의 경우에는 그의 배신이 그의 명예를 어느 정도 더럽힐지언정 그를 구단 최고의 전설 위치에서 끌어내리지는 못합니다. 옥에 티가 났다고 해서 돌멩이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Q: 명예의 전당에서 공과 과의 크기를 주 맹점으로 잡으셨군요. 특히 데얀의 공은 구단 역사상 최고급이기에 수원 이적으로 그걸 다 가릴 수는 없다는 맹점이고요.

A: 물론입니다.

Q: 허경원 군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좋아하시니 상황을 가정해서 여쭤보겠습니다. 그리즈만이 바르셀로나에서 순조롭게 적응에 성공해 알레띠로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알레띠 구단을 주기적으로 비난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도 그리즈만을 알레띠 명전이 있다면 헌액하자고 주장하실 수 있겠습니까?

A: 더 이상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전히 아틀레티코를 사랑했고, 그리즈만이 말씀하신 대로의 행보를 보여주었더라도 그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 중 하나로 대우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Q: 자신이 세운 논리에 합치하는 타당한 답변이시군요. 더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A: 추가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데얀과 같은 선수를 구단의 레전드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들의 주장은 그들의 감정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신뢰를 깨뜨리고 이적한 일이 구단과 팬들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주었다고 하나 그 이전까지 구단에서 헌신하며 쌓은 공헌에는 비할 바가 안 됩니다. 냉정하게 구단에 미친 득이 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신이라는 행적 하나만 보고 절대로 레전드가 될 수 없는 배신자라고 낙인을 찍어버리죠. 이성이 아닌 감성에 기반한 호소일 뿐입니다. 결국 어떤 선수가 구단의 레전드냐 아니냐에 대해 그들이 최우선으로 적용하는 기준은 팬의 입장에서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했느냐입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야 있죠, 그들 자유니깐요. 단 거기에 합리성은 없어요.

A: 세상은 팬들 사이에서의 민심이라는 요소를 그들은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민심과 인기는 중요하지만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는 주제에서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일관성이 없으며 결론으로 이어지는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다시 데얀의 예시로 돌아와서, 서울 팬들이 데얀을 싫어하니 레전드가 아니라고요? 서울 팬들이 모두 데얀을 싫어하고 레전드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데얀을 용서하고 좋아하는 팬들은 팬이 아닙니까? 다수가 그렇다고 해서 잠재적인 소수의 의견을 탄압하고 집단 전체의 의견을 획일화해도 됩니까? 그들은 축구에서 팬의 중요도를 지나칠 정도로 강요하는데, 팬들 사이에서 다수의 목소리를 전체로 일반화하는 것이야말로 팬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모순이죠.

Q: 하기야 팬덤이란 다양한 사람이 한 목적으로 묶인 조직이죠. 서울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지만 데얀에 대한 마음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A: 그리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팬들의 감정이 구단의 역사 위에 올라설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해봐야 합니다. 팬을 포함한 구단의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구단의 역사를, 팬이 자신의 감정에 기반하여 못 본 체하는 것은 잘못됐습니다. 그것은 팬이 축구를 보고 구단을 사랑하는 이유가 반대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배신으로 인해 민심을 잃으면 레전드가 될 수 없다'는 그들의 주장에 공감해보려 해도, 뭔가 이상합니다. 그 민심이라는 게 올바른지를 떠나서도, 일관적이지 않고 너무나 흔들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저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데얀처럼 팀의 기둥이었다가 배신한 많은 경우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저 주장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럴 수 있을까요?

A: 축구의 긴 역사와, 다른 스포츠들을 탐구하면서, 많은 경우들을 봐왔습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팬들의 민심이라는 것은 절대로 진리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파도처럼 휩쓸리는 것이 민심이고, 때로는 정보나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기도 하죠. 애초에 이성적인 영역에 감정이 개입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지만, 만약 감정적인 요소가 개입했을 때 얼마나 우스운 꼴이 나오는지를 알아봅시다. 브라질 축구의 전설 지지뉴는 플라멩구에서 329경기 146골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또한 3번의 주립리그 우승을 이끌었죠. 이 선수도 마찬가지로 단순 우승 트로피와 공격포인트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플레이메이커로서 경기 영향력이 매우 대단했거든요. 펠레의 등장 이전까지 브라질이 낳은 최고의 축구선수로 칭해도 손색이 없는 위대한 선수입니다. 이 선수는 플라멩구의 레전드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Q: 저는 지쿠와 주니오르, 그리고 제퀴냐 만큼은 아니더라도 지지뉴가 플라멩구의 레전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A: 저 설명만 들어보면 뭐 당연히 레전드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제가 빼먹은 설명이 하나 있습니다. 저 선수도 데얀과 같은 배신자입니다. 플라멩구와의 계약 도중에 방구 AC와 이적에 대한 사전 협상을 몰래 진행했고, 플라멩구 구단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적을 강행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축구 역사에 남을 혐오스러운 사실' 등으로 표현했고 지지뉴를 마치 돈에 미친 사람처럼 묘사했죠. 사전 접촉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데얀보다도 악질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A: 자 이제 데얀이 FC 서울의 레전드가 아니라는 분들에게 여쭤보겠습니다. 이제 생각이 바뀌셨나요? 아니면 혼란스러우신가요? 만약 당신이 '배신으로 인해 민심을 잃으면 레전드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신다면, 지지뉴의 경우에도 그는 레전드가 아니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자, 지지뉴는 플라멩구의 레전드일까요?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플라멩구의 팬들도 그를 레전드로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플라멩구 역대 베스트 XI에서도 그의 이름은 거의 빠지지가 않습니다. 팬들의 투표에서도 말이죠. 데얀보다도 나쁘게 구단을 배신한 선수인데 왜 민심이 나쁘지 않을까요? 민심이란 확실한 개연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변수에 따라 다르게 움직이는 불확실한 개념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A: MLB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죠.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의 라이벌리는 스포츠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치열한 라이벌리 중 하나로 유명합니다. 혹여나 북미 스포츠는 지역 연고성이나 팬들의 감정이 축구만큼 강하지 않다는 편견으로 지적할 수도 있으니 미리 말해두겠는데, 꼭 그렇지는 않을뿐더러 레드삭스와 양키스는 앞서 말했듯이 매우 격렬한 라이벌이고 지역 정체성도 강한 구단들입니다.

Q: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에 관해선 야구에 대해 잘 모르는 저도 들어본 적 있는 사례입니다.

A: 보스턴 레드삭스 역사상 최고의 3루수로 꼽히는 웨이드 보그스는 FA를 통해 뉴욕 양키스로 이적했습니다. 레드삭스에서 양키스로 제 발로 이적한 경우는 그가 최초였고 많은 논란과 팬들의 실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레드삭스에서는 하지 못했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양키스에서는 맛볼 수 있었죠. 우승을 하고 아주 기뻐하는 그의 모습은 레드삭스 팬들에게 나쁘게 보였을 것은 자명합니다.

Q: 역대 레벨의 퍼포먼스를 선보인 선수가 토트넘 핫스퍼의 솔 캠벨과 같은 행적을 보였군요.

A: 은퇴 이후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는 대답하기 조심스러우신가요? 그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영구결번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보스턴 레드삭스는 원래 영구결번에 대해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구단입니다. 구단에 10년 이상 헌신하고 은퇴를 이곳에서 해야 하며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조건을 요구했었습니다. 그 기준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 해도, 최악의 라이벌로 스스로 이적한 선수에게 영구결번을 바친 것은 다소 파격적인 대우입니다.

A: 현대 축구에도 비슷한 경우들이 있죠. 리버풀을 배신한 마이클 오언과 페르난도 토레스는 팬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리버풀 구단에서 공식적으로 레전드처럼 대접을 받고 있으며 특히 오언은 구단 엠버서더이기도 합니다. 토레스가 레전드 매치에서 뛸 때 팬들은 환호했죠.

Q: 심지어 마이클 오언은 "이길 수 없으면 합류하라."와 같은 망언을 쏟아내며 이적하기도 했죠. 하하.

A: 결국 배신자들 하나하나의 경우에 그의 민심과 명예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칠 수는 있지만 배신자라는 이유로 명예의 전당에 들여보낼 수는 없다는 일반적인 주장을 확립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배신으로 인해 팬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더라도 구단 역사에 큰 기여를 했다면 레전드로 대우해 주는 것이 일관적이고 논리적으로 결점이 없으며 옳습니다. 어떤 선수가 구단의 레전드인지, 또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할 때는 그가 구단에 미친 득실을 이성적으로 따져보는 기준을 적용해야만 합니다. 저는 이 주장에 대한 반박을 모두 반박할 자신이 있습니다.

Q: 대단한 자신감이시군요 허경원 군. 양자강과 같이 길지만 지루하지 않았던 유려한 답변 감사합니다. 생각 잘 들었습니다.

 

 


Ⅳ-Ⅲ. 지금 장난해? 데얀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자격이 없다.

 

강민오 의견

 

- 팬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선수를 레전드로 지칭한다면 다른 구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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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서울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데얀은 들어가야 할 것인가?'라는 설문에서 '지금 장난해? 데얀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자격이 없다.' 항목을 선택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A: 간단합니다. 축구는 팬 스포츠입니다. 팬이 없다면 축구선수들은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뛸 수 없고,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 수도 없죠. 명예의 전당은 구단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선수이면서, 팬들에게 사랑받으며, 후대 선수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들어가야 한다 믿습니다.

A: 물론 팬이 벼슬이라는 건 아니지만, 데얀 다먀노비치는 FC 서울 팬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선수입니다. 이런 선수가 구단 명예의 전당에 든다면, 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더불어, 다른 선수들은 구단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단순히 감독과 불화가 있었다 해서 굳이 다른 많은 선택지를 두고 최대 라이벌 팀으로 이적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결격사항이라 생각합니다. 제 생각엔 K리그와 FC 서울 역대 최고의 외인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선수이지만, 팬들에게 사랑받을 선수는 아닌 것 같네요.

Q: 역시 명예의 부분에서는 팬의 민심 역시 중요하시다는 의견이시군요.

A: 예 그렇습니다.

Q: 그러면 실제로 일어날 일은 아니지만 가정해서 여쭤보겠습니다. 데얀의 수원행 역시 황선홍 체제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깐요. 만일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뛰는 벤제마가 바르셀로나로 복귀한다면 그를 레알 마드리드 항목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생각 역시 동의하십니까?

A: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벤제마가 이룬 업적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레알 마드리드 현지에서 민심을 잃어버릴것 같긴 하네요.

Q: 저는 현지 팬들의 생각보다 강민오 군의 생각이 더 궁금합니다.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A: 데얀과 벤제마가 팀에서 보낸 세월, 이적 방식 모두 많이 다르다 생각합니다. 만약 벤제마가 저런 과정으로 이적한다면, 그를 레전드로 대우하긴 하겠다만, 제 평가는 이적 후 벤제마가 할 발언과 보일 태도에 중점을 둬서 달라질 것 같네요. 기록 말소, 항목 제외까진 아니더라도 이전처럼 좋아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Q: 솔직하면서도 진중한 답변 감사합니다. 생각 잘 들었습니다.


임규진 의견

 

- 현재로서는 불가능, 하지만 시간이 지나 팬들이 데얀을 용서한다면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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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서울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데얀은 들어가야 할 것인가?'라는 설문에서 '지금 장난해? 데얀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자격이 없다.' 항목을 선택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A: 데얀이 서울에서 이룬 기록과 업적은 존중하지만, 다른 클럽도 아니고 그가 라이벌 팀인 수원으로 이적을 감행한 부분에 대해서는 K리그 역사에서도 상당히 큰 이슈였고, 서울팬들은 상당한 배신감과 함께 충격으로 와닿았습니다. 물론 기록적인 측면에서는 레전드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상징적인 측면에서는 그의 이적행위로 인해 크게 상실했다 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명예의 전당으로 들어가기에는 그 파장이 커서 힘들다고 봅니다. 하지만 나중에 이미지가 회복이 되고 차차 나아진다면 그때는 고려해 볼 만하다고는 생각합니다.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 호나우두, 미카엘 라우드루프와 바르셀로나처럼요.

Q: 팬들의 민심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시간이 약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A: 예 그렇습니다.

Q: 임규진 군은 포항 스틸러스의 울트라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이적 과정에서의 태업으로 포항에서 민심을 크게 잃은 홍명보 역시 팬들 동의 없이 포항 레전드 명단에 등록되었습니다. 홍명보 명단 등록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당시 명예의 전당에 든 홍명보 또한 논란이 많았습니다. 질문처럼 한일 월드컵에서 브론즈볼 수상을 하였기에 몸값이 많이 오른 상태여서 홍명보 본인이 이적을 원했고, 구단은 터무니없는 이적료 제시에 반대를 하였습니다. 홍명보는 이에 반발해 태업을 하기도 했고, 항의의 의미로 월드컵을 끝나고 미래가 창창한 선수였던 송종국에게도 위험한 백태클을 하기도 했고요.

Q: 확실히 그 부분을 젊은 선수도 어니고 만 33세의 베테랑이 보일 태도는 아니었죠.

A: 무엇보다 데얀과는 궤가 다른 게 활약기간 역시 심심하면 시즌 도중에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었기에 국내보다 해외에서 활약한 시간이 더 많았고 국대에서 활약한 이름값 때문에 들어갔다는 말도 많았습니다. 또한 본인 스스로 가시와 레전드는 할 수 있겠으나 포항 레전드는 어렵지 않을까라고 밝혔습니다. 쉽게 말해서 주워온 레전드이자 이름값에 인한 레전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Q: 데얀과는 궤가 다르지만 만약 데얀이 선정된다면 비슷한 비판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시군요.

A: 네 맞습니다

Q: 진중한 답변 감사합니다. 임규진 군의 생각 잘 들었습니다.

 

 


장성경 의견

 

- 불명예스러운 모습을 보인 선수는 명예의 전당과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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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서울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데얀은 들어가야 할 것인가?'라는 설문에서 '지금 장난해? 데얀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자격이 없다.' 항목을 선택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A: 한 마디로 '명예'라는 단어 자체가 팬들이 있기에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해당 항목을 선택했습니다. 실제로 FC 서울과의 결별 직후 최대 라이벌인 수원 삼성을 다음 보금자리로 삼은 행보는 실로 불명예에 가까웠기 때문에 FC 서울에 근속되어 있던 동안의 커리어는 인정될지언정 '그것만으로 팬들의 공감을 이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Q: 실적 이상으로 중요할 수 있는 명예에 대한 부분을 중점으로 보셨군요. 

A: 넵. 맞습니다.

Q: 진중한 답변 감사합니다. 성경님의 생각 잘 들었습니다.

 

 


조장현 의견

 

- 존중은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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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서울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데얀은 들어가야 할 것인가?'라는 설문에서 '지금 장난해? 데얀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자격이 없다.' 항목을 선택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A: 데얀이 경기장 안에서 훌륭한 업적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그는 구단과 팬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구단이 공식적으로 레전드들을 대우하는 자리에 그를 굳이 포함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Q: 존중을 받으려면 먼저 존중을 하라는 의견으로 들리네요. 서울 팬들을 존중하지 않은 것은 데얀이기에 서울 팬들의 존중을 받을 자격 역시 없다고 생각하시는군요.

A: 네 맞습니다.

Q: 그럼 비슷한 이야기로 조장현 군이 서포팅하는 레알 마드리드 구단 레전드 페이지에 베일이 등재된 부분에 대한 생각도 여전히 부정적이시겠군요?

A: 네 그렇습니다. 베일은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에서 FC 서울에서의 데얀만큼 비중을 차지하지도 못할 뿐더러 구단에 머문 기간에도 재정적으로 큰 손해를 입혔으며 팬들을 존중하지 않는 인터뷰를 했습니다.

Q: 설문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FCU 회원이 아닌 익명의 FC 서울 팬의 의견

 

- 이제는 악영향만 남은 가치와 명예 없는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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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FC 서울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데얀은 들어가야 할 것인가?'라는 설문에서 기록을 봐라. 들어간다를 선택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A: 축구선수들은 생산성이 없는 공놀이를 하고도 과분한 돈과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팬들이 있습니다. 팬들은 돈을 써가며 선수들을 응원하러 1년에 약 20번을 자신들의 홈 경기장에 방문하거나 원정 경기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경기날이 아니면 잘 입지 않는 유니폼도 매년 몇 벌을 삽니다. 그리고 그 수익으로 선수들은 자신들의 연봉을 받습니다. 그 연봉을 측정하는 데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팬들의 지지도도 평가 요소가 됩니다. 데얀은 물론 서울에서 명예로운 기록을 써내려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팬들과 구단을 배신하며 라이벌 팀으로 이적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그동안 큰 사랑을 준 팬들을 기만한 행위를 명예롭다 볼 수 있습니까? “명예의 전당”에서 가장 중요한 ‘명예’. 명예에는 성적 말고도 다른 요소들이 충분히 고려될 수 있음을 깊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Q: 혹시 상술한 부분 외에 다른 요소라 한다면 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A: 물론입니다 현실적인 이유로, 축구단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브랜딩 가치입니다. 브랜딩 가치는 구단의 성적, 이미지, 인지도, 충성도, 재무현황, 미디어 노출 등으로 평가됩니다. 만약 구단을 배신하고 라이벌 팀으로 이적한 선수를 명예의 전당에 헌액시킨다면, 슈퍼매치를 대한민국 최고의 더비매치라고 홍보해 온 구단의 이미지 가치는 당연히 떨어질뿐더러 그 선수에 악감정이 남아있는 팬들의 충성도도 낮아질 것입니다. 또한 현 선수단이나 유스 선수들에게 “축구만 잘한다면 라이벌 팀으로 이적하든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든 인정받을 테니 크게 상관없다”라는 심히 안 좋은 분위기가 생겨나 제2, 제3의 데얀(성적으로서의 데얀이 아닌 배신자 데얀)이 탄생할 수 있고, 이로 인해 구단의 브랜딩 가치가 심각하게 실추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런 리스크를 감당하면서까지 데얀을 명예의 전당에 헌액할 이유는 없습니다.

Q: 슈퍼매치의 가치와 연계한다는 주장은 가장 설득력이 있었던 주장입니다. 그리고 현 선수단이나 유스 선수들에 대한 반면교사 역시 옳은 말이었습니다.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Ⅳ-. 요약 및 결론

 

지금까지 'FC 서울이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데얀은 명예의 전당 입성이 가능한가?'라는 주제에 대해 여러 의견을 들었습니다.

'데얀이 세운 공을 무시해서는 안된다.'와 '데얀의 행동을 좌시하면 민심이 나빠지고 브랜드로도 타격이 크다."라는 맹점이 격돌합니다.

자 그럼 이젠 여러분의 몫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은 어떠한가요? 데얀이 FC 서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합니까?

 


Ⅴ. 빅매치 승부예측

 

Ⅴ-Ⅰ. 레알 마드리드 vs FC 바이에른 뮌헨

 

1. 경기 전 소개

 

 

11년간의 공든 탑이 바이에른 뮌헨과 또다시 더블을 노리는 레알 마드리드. 유럽 축구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의 두 클럽이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재격돌한다. 

레알 마드리드의 가장 큰 소식은 다니 카르바할이 복귀한다는 것. UCL 8강 2차전, 맨체스터 시티와의 카드 누적 징계로 인해 바이언과의 준결승 1차전 결장을 피할 수 없었다. 2차전을 앞서고 복귀를 준비하는 주전 수비진들의 호흡의 재결성이 예상되며, 22-23 시즌 맨 시티와의 0:4 대패 치욕을 씻어내고 올라온 선수진들은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한 사투를 벌일 것이다.

카디스와의 리가 경기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서의 리커버리와 태클 능력을 증명했던 좋은 폼의 카마빙가는 레알 마드리드의 미드필더 라인에서 변수를 일으킬 수 있는 카드로 지목받고 있으며, 또한 주전 선수진이 아니었던 프란 가르시아와 브라힘 디아스는 좌측 라인에서 예상치 못한 시너지를 발산했다. 이는 후반부 승부수를 판가름 지을 수 있는 조커 카드의 활용으로 바이언의 허를 찌를 수 있는 또 다른 무기이다.

반면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 전 소식에는 희소식이 줄을 이루지는 못했다. 먼저 1차전 홈경기에서의 라인 컨트롤과 김민재의 PK 헌납으로 인하여 2실점을 면치 못했으며, 많은 비판이 오갔었다. 이에 이어 좌측 풀백의 게헤이루는 주말 리가 경기였던 슈투트가르트전 전반 17분 만에 부상으로 경기를 마무리하게 되었으며 이는 준결승 2차전 원정 경기에 사이렌을 울리게 되었다. 최근 알폰소 데이비스의 부진과 줄 이은 부상으로 인하여 수비진 조합의 변동이 잦은 바이언, 원정길로 떠나는 험난한 여정이기에 수비 형태와 실수를 줄이는 것에 포커스를 둔 채 경기에 임할 것으로 보인다.

홈에서 좋은 공격력을 선보였던 바이에른 뮌헨, 이는 승부를 2차전까지 끌고 가는 희망의 불씨나 다름없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지지 않는 챔피언 DNA가 또다시 드러날지, 바이언의 무관을 막는 기적의 뿌리가 될지, 한 치의 양보 없는 메가 클럽들의 치열한 경기가 예상된다.


2. 경기 전 예측

 

 

FCU 회장 박수용: 바이에른은 홈에서 이겼어야 했다. 설령 원정 선제골을 득점한다고 해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90분은 너무나도 길다.

FCU 부회장 허경원: 리그 우승을 확정 지은 레알 마드리드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온 힘을 쏟아붓는다. 슈투트가르트에게 일격을 당하고 리그 2위마저 위태로워진 바이에른 뮌헨은 그들을 상대하기에 버겁다.

FCU 이사 박현수: 수비진의 실수가 적은 팀이 결승행을 따낼 것이다

 

FCU 이사 강민오: 올시즌 베르나베우의 레알은 지지 않는다. 직전 리그 경기에서 주전조를 일부 가동하고도 완패당한 뮌헨과 로테이션을 완벽히 돌리고 완승을 거둔 레알의 분위기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레알 마드리드의 2골 차 승리를 예상해본다.

FCU 회원 황도윤: 2-1 레알 마드리드 승리,  돌아온 카르바할을 바탕으로 한 견고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홈 이점을 잘 살릴 것을 고려하여 레알의 승리 예측.

FCU 회원 신준 (첼루키): 빅게임 체인저, 맞춤전술의 대가인 둘의 대결이기에 진부한 말이겠지만 또다시 '예측할 수 없다'

FCU 회원 조장현: 홈팀 레알이 살짝이나마 더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찰나의 방심은 경기를 바이언 쪽으로 기울게 만들 것이다


Ⅵ. 크레딧

 

매거진 총괄, 칼럼 작성 및 총검수- FCU 회장 박수용
컨텐츠 기획 및 칼럼 작성 - FCU 부회장 허경원
컨텐츠 기획 및 메인 표지 작성 - FCU 이사 박규빈

메인 표지 작성 - FCU 이사 장성경

메인테마 칼럼 작성 - FCU 회원 임규진

 

테마칼럼 작성 - FCU 이사 권순호
테마칼럼 작성 - FCU 이사 박현수
테마칼럼 작성 - FCU 회원 박영빈
테마칼럼 작성 - FCU 회원 최원준
일반칼럼 작성 - FCU 회원 조장현

일반칼럼 작성 - FCU 회원 정재욱

 

인터뷰 참여- FCU 회원 강다민

인터뷰 참여- FCU 회원 강민오

인터뷰 참여- FCU 회원 오성윤

인터뷰 참여 - FCU 소속이 아닌 익명의 FC 서울 팬


빅매치 승부예측 작성 - FCU 회원 황도윤 
빅매치 승부예측 참여 - FCU 회원 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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